[유시춘컬럼] 아프냐? 나도아프다!
박창홍(15)
작성일
05-01-13 01:58 10,023회
0건
본문
2002년 대선 직후에 전혀 뜻밖의 장소에서 눈물이 핑돌면서 목울대가 떨리는 감동을 먹은 적이 두 번 있었다.
70년대에 좋은 대학 나와 부자집에 시집가서 별 어려움없이 남부럽지 않게 잘 사는 친구들이 모인 송년회자리였다. 영롱한 샹들리에 불빛과 우아한 양탄자의 감촉이 포근한 호텔룸이었는데 10여년만에 보는 옆자리의 친구가 나를 룸밖으로 잠시 나가자고 했다.
얘, 걱정돼서 그러는데 혹시 너 노무현당선 얘긴 아예 꺼내지 마라. 여긴 번지수가 아닌 거 알지? 그나저나 잘됐다. 얘, 나도 노무현 당선에는 한몫했다.
영문을 몰라 눈을 크게 뜬 내게 친구가 말했다. 내 이 손에 물집잡혔었다. 희망돼지 배를 한 천마리쯤 땃을 거야. 돈에서 지독한 냄새와 먼지가 난다는거 첨 알았다. 시부모 몰래 닷새나 나갔단다.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자갈치 아지매처럼 퍼질러 앉아서 가위로 돼지배를 가르고 있는 친구의 모습이 이후로도 오래 나를 떠나지 않았다.
또 하나. 19일 새벽에 여명이 마악 일어서려는 아파트 단지를 돌며 정몽준의 지지철회를 대서특필하면서 노골적인 선거운동을 하고 있는 신문들을 통째로 수거해버리기 위해 신새벽의 검객처럼 날렵하게 몸을 날리던 한 떼의 내 제자들의 무용담이었다.
그들은 왜 그랬을까. 그들은 참여정부 출범이후 어떤 마음의 보상을 받았을까? 이 땅의 가장 평범한 주부요 청년인 그들은 왜 노무현의 당선을 간절히 바라면서 ‘거짓말’과 ‘도둑질’을 감행했을까? 참여정부는 그들의 계급적, 물질적 이익을 보장하는 정부가 아닐 것임에 분명한데도 말이다. 오히려 자영업자의 자금난과 청년실업으로 그들의 생활은 이즈음 무척 어렵다.
그들이 바란 것은 더 잘먹고 잘 살자는 뜻이 아니라 뒤쳐진 자가 앞선 자 되고, 누명쓰고 억울한 사정들 바로잡고, 정치적반대자를 빨갱이로 옭아매는 비열한 시스템을 해체하고, 을사오적의 자손이 오히려 내땅 내놓으라고 으름장을 놓는 이 뒤집힌 현상을 개선광정하라 함이었다. 문자속으로 하자면 최소한의 ‘사회정의’와 ‘공동선’을 추구하는 정부를 갈망함이었다. 경제성장만을 유일무이한 국가경영철학으로 숭배했다면 제2의 박정희같은 인물을 선택했을 것이다.
이즈음, 참여정부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마음이 아프다. 속시원하게 비난하지도 못하면서 속이 많이 상한다. 드러내놓고 야단치고 비난하고 저주할 수 있다면 얼마간 시원하기라도 할텐데. 죽을 힘을 다해 난산끝에 출산한 내 새끼를 보는 것 같다.
참여정부의 교육부의 수장이 하필이면 이나라 구주류, 사회지도층이 더러 각각 지니고 있는 티끌을 총집합해서 백화점을 차린 이란 말인가. 열거하기도 진부한, 신물나는 온갖 특혜와 병폐를 하나 빠짐없이 지닌 이를 임명하기까지 제동을 거는 장치 하나 없었더란 말인가. 교육부총리 개인이 지닌 정당하지 않은 여러 의혹에 마음이 상하는 것보다도 ‘참여’정부에 건강한 여론이 참여할 시스템이 없다는 사실이 더욱 무겁고 중하게 다가온다.
게다가 ‘능력’ ‘전문성’우선이라는 변이 더 가슴을 때린다. 그의 이른바 교육개혁을 수행하는 ‘능력’ ‘전문성’이 귀신잡는 부적이나 사람의 속내를 판독하는 ‘독심술’같은 초능력이 아닌바에야 그것 역시 이 사회의 도덕적 합의 위에 기초해야 하는 것이다. ‘능력’ ‘전문성’이 최우선적 덕목이라면 과거에 교육행정을 밀어붙여 평준화, 입시정책을 하루아침에 군소리없이 효율적으로 바꾸어 버린 관료들을 모시고 옴이 훨씬 더 타당하다.
노무현대통령으로부터 왕정의 시대가 가고 진정한 공화국이 도래했다는 도올의 지적에 국민들이 공감하는 것은 노무현이 스스로 모든 권력을 국민의 것으로 놓아버린 과감한 실천을 수행했기 때문이다. 역설적이게도 그 첫 번째 희생은 그의 분신과 수족들이다.
풀어놓아 버린 권력이 진정한 국민의 권력이라기 보다는 공공연히 집권세력을 향해 칼을 빼도 속수무책인 것이 지금의 형국이다.
그러나 우리는 기다려야 한다. 새살이 돋아 오르려면 시간이 필요하다고 매우 부당해 보이는 현상을 인내하고 기다리려고 한다.
과거의 절대권력 ‘왕정’에는 권력과 국민들 사이에 소통이 전무했었다. 이승만과 박정희는 그런 결과로 죽는 날까지 자신을 ‘건국의 아버지’ ‘구국의 영웅’으로 확신했다. 절대권력이 절대부패하는 긴 세월동안에도 권력과 국민사이에 소통이 부재했기 때문에 그들은 부질없는 환상의 노예로 타락하고 그리고 파멸했다.
인간사와 자연을 막론하고 소통되지 않는 모든 것은 썩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상호침투와 교류가 막혀버린 존재는 없는 것과 같다.
‘참여’정부는 소통의 정부여야 한다. 지지와 비판, 비난, 저주까지도 듣는 열린 귀를 지녀야 한다. 거대 족벌언론의 ‘저주의 굿판’은 듣고 보지 않으려 해도 매시각 물리적으로 차단할 방책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그 소리가 자못 요란하니 저절로 들린다.
그러나 과잉대표성의 소지가 다소 논란이 될 수 있겠으나 국민의 권력이라 할 시민사회단체의 소리는 자칫 흘리기 쉽다. 때로 철없는 이상주의자로 몰리기도 하지만 이들의 주장은 원칙과 도덕의 합의에 서 있다. 지난 연말의 국보법폐지를 위한 목숨건 1천여명의 단식단의 소리를 경청해야할 소이가 바로 여기 있다.
참여정부 초기의 ‘국민참여수석’신설은 매우 적절한 양식이었는데 왜 폐지했는지 모르겠다.적어도 청와대의 한 부서쯤은 시민사회의 담론과 흐름을 경청하고 이와 부단히 소통하는 업무를 담당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인맥에 의한 정보의 독점이 아닌, 여론의 시스템화를 기할 수 있다.
아직 우리 시민사회의 구성은 일천하고 빈약하지만 그나마도 이들과 괴리된다면 참여정부의 건강성은 매우 위험해질 수 있다.
흐르는 물에는 이끼가 발붙이지 못한다. 인사결정구조는 잠시도 안이하거나 나태해서는 안된다. 이번 사태는 곧 취임 3주년을 맞는 참여정부의 운영시스템에 빨간 경고등이 켜진 것으로 읽어야 한다.
나뭇잎 하나 물독에 살짝 떨어지는 걸 보고 사람들은 천하의 가을을 짐작한다. 교육부총리라는 엄중한 자리를 정함에 있어 5단계에 이르는 검증과정 어느곳에서도 브레이크가 세게 걸리지 않았음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의사결정구조와 시스템의 어느 한 부분이 동맥경화에 걸렸거나 막혀버린 필연의 결과로 봐야 한다. 기와 혈이 섬세하게 유통하는 작은 우주인 인체에서 가장 치명적인 병은 ‘막혀’버리는 것이라 한다. 흐르고 소통하지 않으면 정체되다가 기어히 막혀버린다. 만병의 근원이라 한다.
이번 인사파동은 청와대 내부에 부지불식간에 자라잡은 안이함과 경화현상에 대한 조기경보음으로 수용해야 할 것이다. 거대언론과 수구세력들은 쾌재를 부르고 비난과 저주의 신명나는 춤을 출지 모르지만 참여정부와 지향을 공유하는 대다수는 마음이 몹시 상했다.
대통령이 입은 상처 때문에 함께 아프다. 도덕성과 개혁성을 주문했건만 그 소망을 짓밟은 처사에 심사가 몹시 상했다. 소통의 공간을 넓히고 혹여 자리잡을지 모르는 안이함을 발본색원해야 한다. 필자의 소견으로는 지난 국보법 천막농성장에는 신분을 숨긴 채, 청와대 행정관과 비서관 몇몇쯤은 몰래 하루 이틀이나마 동참했어야 한다.
그들의 진정성이 무엇인지 어떻게 국정에 스며들게 할 것인지 함께 굶으며 골똘히 고민하는 사람이 있었어야 마땅하다.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아 있다.
‘공화정’의 개척자정신이 녹쓸지 않으려면 부단히 소통하고 살피고 상호침투해야 한다. 속이 상할대로 상했음에도 시원하게 내뱉지 못하는 우리는 지금 많이 아프다. ‘중생이 아프니 부처도 아프다’. 유마거사의 깨달음을 새겨 들을 때이다.
ⓒ 데일리서프라이즈
70년대에 좋은 대학 나와 부자집에 시집가서 별 어려움없이 남부럽지 않게 잘 사는 친구들이 모인 송년회자리였다. 영롱한 샹들리에 불빛과 우아한 양탄자의 감촉이 포근한 호텔룸이었는데 10여년만에 보는 옆자리의 친구가 나를 룸밖으로 잠시 나가자고 했다.
얘, 걱정돼서 그러는데 혹시 너 노무현당선 얘긴 아예 꺼내지 마라. 여긴 번지수가 아닌 거 알지? 그나저나 잘됐다. 얘, 나도 노무현 당선에는 한몫했다.
영문을 몰라 눈을 크게 뜬 내게 친구가 말했다. 내 이 손에 물집잡혔었다. 희망돼지 배를 한 천마리쯤 땃을 거야. 돈에서 지독한 냄새와 먼지가 난다는거 첨 알았다. 시부모 몰래 닷새나 나갔단다.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자갈치 아지매처럼 퍼질러 앉아서 가위로 돼지배를 가르고 있는 친구의 모습이 이후로도 오래 나를 떠나지 않았다.
또 하나. 19일 새벽에 여명이 마악 일어서려는 아파트 단지를 돌며 정몽준의 지지철회를 대서특필하면서 노골적인 선거운동을 하고 있는 신문들을 통째로 수거해버리기 위해 신새벽의 검객처럼 날렵하게 몸을 날리던 한 떼의 내 제자들의 무용담이었다.
그들은 왜 그랬을까. 그들은 참여정부 출범이후 어떤 마음의 보상을 받았을까? 이 땅의 가장 평범한 주부요 청년인 그들은 왜 노무현의 당선을 간절히 바라면서 ‘거짓말’과 ‘도둑질’을 감행했을까? 참여정부는 그들의 계급적, 물질적 이익을 보장하는 정부가 아닐 것임에 분명한데도 말이다. 오히려 자영업자의 자금난과 청년실업으로 그들의 생활은 이즈음 무척 어렵다.
그들이 바란 것은 더 잘먹고 잘 살자는 뜻이 아니라 뒤쳐진 자가 앞선 자 되고, 누명쓰고 억울한 사정들 바로잡고, 정치적반대자를 빨갱이로 옭아매는 비열한 시스템을 해체하고, 을사오적의 자손이 오히려 내땅 내놓으라고 으름장을 놓는 이 뒤집힌 현상을 개선광정하라 함이었다. 문자속으로 하자면 최소한의 ‘사회정의’와 ‘공동선’을 추구하는 정부를 갈망함이었다. 경제성장만을 유일무이한 국가경영철학으로 숭배했다면 제2의 박정희같은 인물을 선택했을 것이다.
이즈음, 참여정부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마음이 아프다. 속시원하게 비난하지도 못하면서 속이 많이 상한다. 드러내놓고 야단치고 비난하고 저주할 수 있다면 얼마간 시원하기라도 할텐데. 죽을 힘을 다해 난산끝에 출산한 내 새끼를 보는 것 같다.
참여정부의 교육부의 수장이 하필이면 이나라 구주류, 사회지도층이 더러 각각 지니고 있는 티끌을 총집합해서 백화점을 차린 이란 말인가. 열거하기도 진부한, 신물나는 온갖 특혜와 병폐를 하나 빠짐없이 지닌 이를 임명하기까지 제동을 거는 장치 하나 없었더란 말인가. 교육부총리 개인이 지닌 정당하지 않은 여러 의혹에 마음이 상하는 것보다도 ‘참여’정부에 건강한 여론이 참여할 시스템이 없다는 사실이 더욱 무겁고 중하게 다가온다.
게다가 ‘능력’ ‘전문성’우선이라는 변이 더 가슴을 때린다. 그의 이른바 교육개혁을 수행하는 ‘능력’ ‘전문성’이 귀신잡는 부적이나 사람의 속내를 판독하는 ‘독심술’같은 초능력이 아닌바에야 그것 역시 이 사회의 도덕적 합의 위에 기초해야 하는 것이다. ‘능력’ ‘전문성’이 최우선적 덕목이라면 과거에 교육행정을 밀어붙여 평준화, 입시정책을 하루아침에 군소리없이 효율적으로 바꾸어 버린 관료들을 모시고 옴이 훨씬 더 타당하다.
노무현대통령으로부터 왕정의 시대가 가고 진정한 공화국이 도래했다는 도올의 지적에 국민들이 공감하는 것은 노무현이 스스로 모든 권력을 국민의 것으로 놓아버린 과감한 실천을 수행했기 때문이다. 역설적이게도 그 첫 번째 희생은 그의 분신과 수족들이다.
풀어놓아 버린 권력이 진정한 국민의 권력이라기 보다는 공공연히 집권세력을 향해 칼을 빼도 속수무책인 것이 지금의 형국이다.
그러나 우리는 기다려야 한다. 새살이 돋아 오르려면 시간이 필요하다고 매우 부당해 보이는 현상을 인내하고 기다리려고 한다.
과거의 절대권력 ‘왕정’에는 권력과 국민들 사이에 소통이 전무했었다. 이승만과 박정희는 그런 결과로 죽는 날까지 자신을 ‘건국의 아버지’ ‘구국의 영웅’으로 확신했다. 절대권력이 절대부패하는 긴 세월동안에도 권력과 국민사이에 소통이 부재했기 때문에 그들은 부질없는 환상의 노예로 타락하고 그리고 파멸했다.
인간사와 자연을 막론하고 소통되지 않는 모든 것은 썩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상호침투와 교류가 막혀버린 존재는 없는 것과 같다.
‘참여’정부는 소통의 정부여야 한다. 지지와 비판, 비난, 저주까지도 듣는 열린 귀를 지녀야 한다. 거대 족벌언론의 ‘저주의 굿판’은 듣고 보지 않으려 해도 매시각 물리적으로 차단할 방책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그 소리가 자못 요란하니 저절로 들린다.
그러나 과잉대표성의 소지가 다소 논란이 될 수 있겠으나 국민의 권력이라 할 시민사회단체의 소리는 자칫 흘리기 쉽다. 때로 철없는 이상주의자로 몰리기도 하지만 이들의 주장은 원칙과 도덕의 합의에 서 있다. 지난 연말의 국보법폐지를 위한 목숨건 1천여명의 단식단의 소리를 경청해야할 소이가 바로 여기 있다.
참여정부 초기의 ‘국민참여수석’신설은 매우 적절한 양식이었는데 왜 폐지했는지 모르겠다.적어도 청와대의 한 부서쯤은 시민사회의 담론과 흐름을 경청하고 이와 부단히 소통하는 업무를 담당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인맥에 의한 정보의 독점이 아닌, 여론의 시스템화를 기할 수 있다.
아직 우리 시민사회의 구성은 일천하고 빈약하지만 그나마도 이들과 괴리된다면 참여정부의 건강성은 매우 위험해질 수 있다.
흐르는 물에는 이끼가 발붙이지 못한다. 인사결정구조는 잠시도 안이하거나 나태해서는 안된다. 이번 사태는 곧 취임 3주년을 맞는 참여정부의 운영시스템에 빨간 경고등이 켜진 것으로 읽어야 한다.
나뭇잎 하나 물독에 살짝 떨어지는 걸 보고 사람들은 천하의 가을을 짐작한다. 교육부총리라는 엄중한 자리를 정함에 있어 5단계에 이르는 검증과정 어느곳에서도 브레이크가 세게 걸리지 않았음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의사결정구조와 시스템의 어느 한 부분이 동맥경화에 걸렸거나 막혀버린 필연의 결과로 봐야 한다. 기와 혈이 섬세하게 유통하는 작은 우주인 인체에서 가장 치명적인 병은 ‘막혀’버리는 것이라 한다. 흐르고 소통하지 않으면 정체되다가 기어히 막혀버린다. 만병의 근원이라 한다.
이번 인사파동은 청와대 내부에 부지불식간에 자라잡은 안이함과 경화현상에 대한 조기경보음으로 수용해야 할 것이다. 거대언론과 수구세력들은 쾌재를 부르고 비난과 저주의 신명나는 춤을 출지 모르지만 참여정부와 지향을 공유하는 대다수는 마음이 몹시 상했다.
대통령이 입은 상처 때문에 함께 아프다. 도덕성과 개혁성을 주문했건만 그 소망을 짓밟은 처사에 심사가 몹시 상했다. 소통의 공간을 넓히고 혹여 자리잡을지 모르는 안이함을 발본색원해야 한다. 필자의 소견으로는 지난 국보법 천막농성장에는 신분을 숨긴 채, 청와대 행정관과 비서관 몇몇쯤은 몰래 하루 이틀이나마 동참했어야 한다.
그들의 진정성이 무엇인지 어떻게 국정에 스며들게 할 것인지 함께 굶으며 골똘히 고민하는 사람이 있었어야 마땅하다.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아 있다.
‘공화정’의 개척자정신이 녹쓸지 않으려면 부단히 소통하고 살피고 상호침투해야 한다. 속이 상할대로 상했음에도 시원하게 내뱉지 못하는 우리는 지금 많이 아프다. ‘중생이 아프니 부처도 아프다’. 유마거사의 깨달음을 새겨 들을 때이다.
ⓒ 데일리서프라이즈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