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씨년스런 중명전을 아시나요?- 한 국회의원의 역사 체크.
박창홍(15)
작성일
05-02-03 21:55 9,538회
18건
본문
올해는 일본 제국주의가 한반도 침탈을 노골화하고 강제로 조약을 체결했던 을사조약 1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아 참! 잊기 전에 명칭과 개념부터 분명히 바로잡아야겠군요. 우리는 흔히 교과서에서 배운대로 습관적으로 을사보호조약으로 부르는데 이는 일본 식민사관식 명명입니다. 보호는 무슨 보호입니까? 을사늑약이라고 부르는 것이 올바른 명칭인 것 같습니다. '을사늑약(乙巳勒約)에서 늑약의 뜻은 '억눌러서 이루어진 조약'이라는 의미이니 이것이 딱 들어맞는 것이지요. 아무튼 그 늑약이 맺어진지 딱 100년이 되는 해입니다.
1905년 11월 7일을 을사 국치일로 알고 있으나 사실은 11월 7일날 오후 2시에 모여서 계속 체결을 거부하다가 날을 넘기고 8일 새벽 2시에 강제로 체결되었다고 합니다. 김삼웅 독립기념관 관장님의 설명입니다. 그런데 이때 찍었던 도장이 고종황제의 옥쇄가 아니라 외무대신의 직인을 강제로 훔쳐서 찍었다고 합니다. 그때 표결결과는 5대3이었나 봅니다. 을사5적이 찬성표를 던진 거지요. 우리가 흔히 쓰는 '을씨년스럽다.'라는 말이 바로 이 을사년의 상황을 빗대어 탄생한 말이랍니다. 참고로 덕수궁의 대문 위에 쓰여진 현판은 원래 '대안문'이었는데 일제가 대한문(大漢門)으로 고쳤는데 한(韓)이 아니라 한(漢)으로 한 것은 이 한(漢)의 의미가 괴한(怪漢)의 의미를 나타낸다고 하니 광화문 현판보다 대한문문제부터 바로잡아야겠습니다.
이야기가 잠시 옆길로 샜군요. 앞서 말한 을사늑약이 강행된 장소가 바로 중명전(重明殿)이라는 서양식 건물입니다. 고종황제가 우리나라도 개화하고 현대의 효율성있는 국가로 나아가려 한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이 당시 서양식 건물을 지었다고 합니다. 이 중명전 건물을 네이버 검색에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군요. 1900년 1월 덕수궁 별채로 건립(建立), 고종의 외교사절단 접견장 겸 연회장으로 쓰였으나, 1904년 덕수궁이 불타자 고종은 이곳으로 옮겨와 1907년 순종(純宗)에게 왕위를 물려줄 때까지 3년간 기거하였다. 중명전의 처음 이름은 수옥헌(漱玉軒)이며, 후에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었던 비운(悲運)의 장소다.
엊그제 제가 직접 그 장소를 찾아갔습니다. 정동의 경향신문사 아래쪽으로 내려오다 보면 예원학교가 있고 이화여고 건너편 쪽에 정동극장이 있고 그 뒤편에 위치하고 있는 허름한 2층 건물이 바로 중명전입니다. 옆 담으로 미대사관저가 덕수궁을 가로막으며 알박이처럼 동편으로 붙어 있더군요.
그런데 이 역사적 장소가 지금은 폐허가 되어 정동극장 주차장으로 쓰이고 있었습니다. 수치스런 역사이던 자랑스런 역사이던 기록과 교훈의 관점에서 그 장소의 성격에 맞게 활용되고 있지 못한 것이지요. 그래서 어제 국회에서 민족문제연구소,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 모임, 문화연대 문화유산위원회, 민주화운동 기념사업회 그리고 정청래 의원실(팜플렛에 이렇게...)이 공동 주최해서 【문화유산(중명전을 중심으로) 어떻게 보존 활용할 것인가?】에 관해서 토론회를 했답니다.
대체적인 의견은 지금처럼 을씨년스럽게 중명전을 방치하면 안되고 경운궁의 복원계획에 따라 정동일대의 문화유산을 전면 정비하는 차원에서 중명전을 활용해야 된다는 의견이었습니다. 슬픈 친일역사 체험관, 사료관으로 활용하자는 방안이 구체적으로 거론되었지요. 또 아참! 덕수궁의 원래 이름이 경운궁이었는데 고종의 호 덕수를 따서 일본사람들이 그렇게 불렀던 것이라네요.
저는 사회를 보면서 마무리 발언으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창경궁 돌담길을 걸어 본적이 있나요? 사랑하는 연인들과 팔짱끼고 그 길을 걸으며 데이트를 한 기억이 있나요? 그런데 그 돌담길이 종묘와 창경궁의 맥을 끊고자 일본총독부에서 강제로 헤집어 낸 길이라는 것은 알고 있나요? 우리가 의미없이 히히닥 거리고 걷는 길과 발자국 밑의 땅이 우리의 슬픈 역사를 무관심하게 밟고 지나가는 것은 아닌지 되새겨 보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하루는 우리의 애국열사들이 그토록 염원했던 미래임을 우리가 혹시 바쁜 일상생활로 잊고 있지는 않은지 한번 되새겨 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이렇게......
저는 가끔 중학교 시절 썼던 일기장을 들여다봅니다. 부끄러운 날도 있었고 성장한 지금 읽어보아도 대견스런 날도 있더군요. 그런데 부끄러운 날이라고 그 날의 일기장을 찢어버린다고 그 날까지 없어지는 것은 아니지요. 부끄러운 역사도 역사이듯이 중명전은 다시는 그런 비극적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체험관으로 제 기능을 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처럼 극장의 주차장으로 사용되고 건물은 귀신 나올 것 같은 상태로 방치되어서는 곤란하겠지요. 여러분들 생각은 어떠세요?
1905년 11월 7일을 을사 국치일로 알고 있으나 사실은 11월 7일날 오후 2시에 모여서 계속 체결을 거부하다가 날을 넘기고 8일 새벽 2시에 강제로 체결되었다고 합니다. 김삼웅 독립기념관 관장님의 설명입니다. 그런데 이때 찍었던 도장이 고종황제의 옥쇄가 아니라 외무대신의 직인을 강제로 훔쳐서 찍었다고 합니다. 그때 표결결과는 5대3이었나 봅니다. 을사5적이 찬성표를 던진 거지요. 우리가 흔히 쓰는 '을씨년스럽다.'라는 말이 바로 이 을사년의 상황을 빗대어 탄생한 말이랍니다. 참고로 덕수궁의 대문 위에 쓰여진 현판은 원래 '대안문'이었는데 일제가 대한문(大漢門)으로 고쳤는데 한(韓)이 아니라 한(漢)으로 한 것은 이 한(漢)의 의미가 괴한(怪漢)의 의미를 나타낸다고 하니 광화문 현판보다 대한문문제부터 바로잡아야겠습니다.
이야기가 잠시 옆길로 샜군요. 앞서 말한 을사늑약이 강행된 장소가 바로 중명전(重明殿)이라는 서양식 건물입니다. 고종황제가 우리나라도 개화하고 현대의 효율성있는 국가로 나아가려 한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이 당시 서양식 건물을 지었다고 합니다. 이 중명전 건물을 네이버 검색에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군요. 1900년 1월 덕수궁 별채로 건립(建立), 고종의 외교사절단 접견장 겸 연회장으로 쓰였으나, 1904년 덕수궁이 불타자 고종은 이곳으로 옮겨와 1907년 순종(純宗)에게 왕위를 물려줄 때까지 3년간 기거하였다. 중명전의 처음 이름은 수옥헌(漱玉軒)이며, 후에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었던 비운(悲運)의 장소다.
엊그제 제가 직접 그 장소를 찾아갔습니다. 정동의 경향신문사 아래쪽으로 내려오다 보면 예원학교가 있고 이화여고 건너편 쪽에 정동극장이 있고 그 뒤편에 위치하고 있는 허름한 2층 건물이 바로 중명전입니다. 옆 담으로 미대사관저가 덕수궁을 가로막으며 알박이처럼 동편으로 붙어 있더군요.
그런데 이 역사적 장소가 지금은 폐허가 되어 정동극장 주차장으로 쓰이고 있었습니다. 수치스런 역사이던 자랑스런 역사이던 기록과 교훈의 관점에서 그 장소의 성격에 맞게 활용되고 있지 못한 것이지요. 그래서 어제 국회에서 민족문제연구소,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 모임, 문화연대 문화유산위원회, 민주화운동 기념사업회 그리고 정청래 의원실(팜플렛에 이렇게...)이 공동 주최해서 【문화유산(중명전을 중심으로) 어떻게 보존 활용할 것인가?】에 관해서 토론회를 했답니다.
대체적인 의견은 지금처럼 을씨년스럽게 중명전을 방치하면 안되고 경운궁의 복원계획에 따라 정동일대의 문화유산을 전면 정비하는 차원에서 중명전을 활용해야 된다는 의견이었습니다. 슬픈 친일역사 체험관, 사료관으로 활용하자는 방안이 구체적으로 거론되었지요. 또 아참! 덕수궁의 원래 이름이 경운궁이었는데 고종의 호 덕수를 따서 일본사람들이 그렇게 불렀던 것이라네요.
저는 사회를 보면서 마무리 발언으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창경궁 돌담길을 걸어 본적이 있나요? 사랑하는 연인들과 팔짱끼고 그 길을 걸으며 데이트를 한 기억이 있나요? 그런데 그 돌담길이 종묘와 창경궁의 맥을 끊고자 일본총독부에서 강제로 헤집어 낸 길이라는 것은 알고 있나요? 우리가 의미없이 히히닥 거리고 걷는 길과 발자국 밑의 땅이 우리의 슬픈 역사를 무관심하게 밟고 지나가는 것은 아닌지 되새겨 보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하루는 우리의 애국열사들이 그토록 염원했던 미래임을 우리가 혹시 바쁜 일상생활로 잊고 있지는 않은지 한번 되새겨 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이렇게......
저는 가끔 중학교 시절 썼던 일기장을 들여다봅니다. 부끄러운 날도 있었고 성장한 지금 읽어보아도 대견스런 날도 있더군요. 그런데 부끄러운 날이라고 그 날의 일기장을 찢어버린다고 그 날까지 없어지는 것은 아니지요. 부끄러운 역사도 역사이듯이 중명전은 다시는 그런 비극적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체험관으로 제 기능을 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처럼 극장의 주차장으로 사용되고 건물은 귀신 나올 것 같은 상태로 방치되어서는 곤란하겠지요. 여러분들 생각은 어떠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