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중국 지식인의 한국예찬 --> 우린 위대한 민족이여...
백락진(15)
작성일
05-03-24 02:28 9,77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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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중국 지식인의 한국예찬
일본의 극우외교평론가 가세 히데아키가 가짜 한국인 필명으로 지난 93년 써낸 <추한 한국인>과 달리, 최근 중국의 권위있는 지식인이 우리가 간과하고 있는 한국인의 우수성을 극찬한 책이 출판돼 화제가 되고 있다.
중국작가협회 회원으로 <천년패론-역사를 읽는 또 다른 방법> 등의 저자인 장홍지에(張宏杰)가 쓴 <중국인은 한국인보다 무엇이 부족한가>(북폴리오 간)가 바로 그 책이다.특히 저자는 과거 한 번도 한국에 이기지 못해 '공한증(恐韓症)'까지 앓고 있는 중국 축구를 예로 들며 한국을 바라보는 등 중국인들의 생생한 느낌을 전하고 있다.
실제로 이 책에는 우리의 현실을 모르는 '과찬'으로 보이는 대목들이 적지않지만, 좀처럼 스스로 자신들의 문제를 인정하지 않고 '중화인'으로 자부해온 중국인들의 달라진 인식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주요내용을 소개한다.
"중국축구의 공한증은 '정신력' 차이에서 비롯"
우선 저자는 중국의 축구 '공한증'부터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저자는 체력과 기술에서는 별 차이가 없지만 '정신력' 차이가 한국축구에 번번히 지는 이유라고 주장했다. 저자에 따르면, 중국의 프로선수들은 공 하나에 목숨을 걸지 않는다. 반면 한국 선수들은 명예를 위해 축구를 하고 축구를 자신의 생명처럼 여겨 승리를 위해선 경기장에서 죽어도 상관없다는 각오로 시합에 나선다.
중국 선수도 시합에 지면 굉장히 안타까워한다(상금에 대한 미련도 포함해서).하지만 하룻밤만 지나면 이미 지난 일로 여기도 다시 평상심을 되찾는다. 하지만 한국인들은 치욕스런 패배에 눈물을 흘리며 한숨도 자지 못할 것이다. 바로 이렇기 때문에, 인구는 중국의 30분의 1, 땅은 중국의 1백분의 1밖에 되지 않는 이 작은 나라가 경기장에서는 계속해서 중국을 격파하는 것이다.
저자의 한.중 비교는 '대중질서'로까지 이어진다. 중국인들은 어릴 적부터 어떻게든 손해를 보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배우며 자란다. 중국의 대학 식당에서는 학생들이 복잡하게 한 데 엉켜서 밥을 탄다. 그러나 한국 학생들은 질서정연하게 줄을 서서 식권을 직접 식권함에 넣고 밥을 타간다.
한일월드컵 때 한국 축구팬들은 경기장에서 복장과 구호를 통일하여 수만 명이 거대한 붉은 물결을 이루며 '대한민국'을 외쳤다. 하지만 중국의 축구팬들은 전체적으로는 결코 적지 않은 숫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사오십 명씩 따로 모여 응원을 했다. 복장도 구호도 제각각에 서로 힘을 합하지 못하고 혼잡한 모습만 보였다. 경기가 끝난 후 한국 축구팬들은 자기 주변의 쓰레기들을 모두 주워서 돌아갔다. 그러나 중국 축구팬들이 떠난 자리에는 쓰레기가 수북했다. 쓰레기들 사이에는 작은 오성홍기도 수없이 많았다.
수단방법 가리지 않는 '실용주의자'들이 중국 망쳐
<중국인은 한국인보다 무엇이 부족한가>(북폴리오 간) ⓒ프레시안
저자는 "중국 민족이 심각한 결점을 갖고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는 한 가지 예만 들어보면 바로 알 수 있다"면서 "중국 내의 크고 작은 도시들을 다니다 보면 가장 눈에 띄는 것이 거리마다 걸려 있는 갖가지 '증명.감정' 광고판들이다. 거리의 담장에는 가짜 물건을 취급하는 사람과 연락을 취할 수 있는 방법이 버젓이 적혀 있다. 세계 어느 나라를 가도 이런 광경은 보기 힘들 것"이라며 가짜가 판치는 중국의 현실을 부끄러워 했다.
저자는 이어 이러한 현실의 원인을 '굴곡진 역사'가 만들어낸 '실용주의'에서 찾았다.
주변 민족들이 아직도 깊은 잠에 빠져 있을 때 중국은 이미 사상적으로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좋은 것은 오래가지 못했다. 겉모습은 허약하면서도 가슴은 냉혹했던 영정(진시황의 본명)이라는 남자가 무모하게 칼을 휘두르며 중국의 청춘기를 너무 빨리 끝내버렸다. 사람들에게 웅재와 대략을 지닌 인물로 비쳤던 진시황은 폭력에 기초한 통치법으로 모든 사람들은 노예로 부역자로 자신의 어가를 끄는 가축들로 만들어버렸다.
중국인의 인격 전체가 무참히 짓밟히고 인간의 존엄성은 완전히 꺾였다. 이런 엄혹한 사회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실용주의자'였다.
한나라 고조 유방이 전형적인 인물이다. 초나라와의 싸움에서 대패한 유방은 자식들과 모사 등공만 데리고 수레를 타고 달아났다. 수레가 더디게 가자 유방은 몇 번이나 두 아이를 밀어 떨어뜨렸다.그때마다 등공은 아이들을 다시 수레로 올렸다. 항우가 유방의 아버지를 죽여 육젓을 담가먹겠다고 엄포를 놓았을 때도 유방은 피식 한 번 비웃으며 육젓을 담그면 자기에게도 꼭 나눠달라고 되받아쳤다.
사서는 유방에 대해 "책읽기는 좋아하지 않으나 성격이 활달하고 계략짜기를 좋아하며 남의 말을 잘 들어주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워낙 친화력이 좋아 문지기나 병사들도 한 번만 그를 보면 바로 옛 친구처럼 느꼈다. 그러나 그는 천하를 평정하자마자 옛 은혜를 저버리고 자기를 위해 목숨까지 내놓았던 전우들을 살육한 사람이기도 했다. 거친 말만 달고 살던 이 건달의 승리는 항우 방식의 고귀하고 엄숙한 이상주의가 이미 대통일 후의 중국에 맞지 않음을 선포하는 것이었다. 그때부터 임기응변에 능하고 수단을 가리지 않는 비열한 무리들이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숱한 외침속 굴종의 정신 확산"
진한 시대 이후 중국에서는 왕도와 패도를 함께 쓰는 통치제도가 갈수록 탄탄하게 자리를 잡았다. 중화문명은 주위의 문명을 이끌고 중국 인민들의 가슴도 대국의 호방함과 자신감으로 충만해 갔다. 이런 자신감이 최고조에 이른 때가 당나라 때의 성당(盛唐)이다.
중국 역사에서 가장 건강한 인격을 지닌 황제 당태종도 이 시기의 사람이었다. 위대한 시인 이태백도 성당 때 등장했다. 아니 성당이기 때문에 등장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표일하고 호방한 이백의 시풍은 당시의 기백과 분위기를 그대로 담고 있다.
그러나 결국은 재앙의 연속이 이 땅의 숙명이었다. 당나라 이후 천년 간 중국 대륙은 수시로 왕조가 바뀌고 끊임없이 외적의 침입을 받았다. 이런 중국의 운명은 중국인들의 심리와 성격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중국인의 자존심과 자신감은 본래 충효를 근본으로 하는 도덕에 기초한 것인데, 왕조가 바뀌면서 충의는 꺾이고 투항이 장려되는 상황이 됐다. 황위가 주마등처럼 바뀌면서 예전에 추앙받던 정의감은 이제 조롱거리가 되고, 점점 많은 사람들이 이전에 가졌던 믿음이나 진지함을 잃어 갔다.
더 놀라운 일은 그 후에 일어났다. 송나라 왕조가 무너진 후 고개숙인 송나라 조정과 백성들 앞에 보무당당하게 나타난 정복자는 줄곧 중원에 복종해 왔던 노린내 나는 오랑캐 유목민이었다. 중원 사람들에게는 그야말로 엄청난 정신적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몽고의 철기병들이 야만스럽게 백성들을 유린하는 상황에서 중원 대국의 백성들은 하루아침에 최하층민으로 취급되는 치욕을 당하며 이후 백여 년 동안이나 몽고 귀족들의 폭정을 받아들여야 했다.
만주족들의 남하 이후에는 더 심했다. 부모에게 물려받아 함부로 훼손할 수 없는 머리카락을 정수리까지 깎아 변발로 만들어서 쥐꼬리처럼 늘어뜨려야 했기 때문이다. 굴욕을 참으며 구차하게 살아가는 상황에서 건강한 인격이 유지되기는 힘들다. 갈수록 많은 사람들이 영혼과 몸의 분열에 익숙해져 갔다. 예를 들어, 장렬하게 죽은 것보다는 비열하게라도 목숨을 부지하는 것이 낫다, 내 얼굴에 침을 뱉어도 저절로 마르기를 기다린다, 자기집 앞의 눈만 쓸고 남의 집 지붕의 서리는 상관 않는다는 식의 사고들이 그것이다.
"독도 지킨 한국의 홍순칠이 부럽다"
그러니 항일전쟁 때 그토록 많은 매국노들이 들끓은 것이 순전히 우연일 뿐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저자는 "중국은 항일전쟁 때는 안중근 같은 인물을, 항일전쟁 후에는 홍순칠 같은 인물을 배출해내지 못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특히 최근 독도분쟁이 재연되고 나서야 국내에서도 그 존재가치를 재인식하기 시작한 홍순칠 독도의용수비대장을 중국인 저자가 극찬한 대목은 우리에게 부끄러움을 안겨주기까지 한다.
"한국전쟁 와중이던 1953년 5월 일본의 우익인사가 독도에 올라가 푯말을 세우자 당시 스물 세살의 한국 청년 홍순칠은 전쟁 기간이라 무기의 관리가 소홀한 틈을 타 불법으로 총을 사고, 열혈 청년 몇 명을 모아 바다 건너 독도에 올라 일본인들을 쫓아내고 태극기를 꽂았다. 이후 홍순칠은 3년8개월 동안 독도를 지켰다. 그의 일기에는 일본의 군함이나 어선과 대치한 상황이 빼곡히 기록돼 있다. 1956년 종전 후 한국 정부가 해양 수비대를 파견하자 그제야 홍순칠은 신성한 국토 수호의 대업을 마쳤다. 한국 정부는 그의 불법 행위를 전혀 탓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훈장을 하사하며 그의 애국적인 행동을 널리 알렸다."
"청렴한 관리는 도태되게 마련"
역대 중국의 관료사회에서는 "청렴한 관리는 도태되게 마련"이라는 말이 그대로 받아들여졌다. 중국인들은 '중용'이나 '원만함'에 신경을 많이 쓴다. 모난 데가 없는 사람이라야 어디서든 환영받을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유방이나 주원장이나 서태후처럼 냉혹한 심장을 가지고, 의리를 버리고, 배신을 일삼으며,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일수록 성공하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이런 사람들은 누구보다도 인자하고 의롭다는 인상을 심어주는 뛰어난 배우의 소질을 갖고 있어야 했다. 반면 솔직하고 자애로운 사람일수록 고초가 컸다.
사실 제왕들의 후안무치함과 파괴본능 때문에 인의도덕이나 삼강오상의 가치는 진작부터 타격을 입어왔다. 지난 역사에서 수도 없이 속아왔다. 그래서 어떤 것이든 쉽게 믿지 못하며 사람들 사이의 믿음도 그만큼 두텁지 못하다. 황제는 공신들이 황위를 찬탈하지나 않을까 전전긍긍하며 그들을 다 없애버려야 비로소 마음이 편해졌다. 가장 인자했다는 황제 이세민도 현무문에서 자기 형제들을 죽인 후 그 아들들까지 무참하게 죽였다.
저자는 "그래서인지 중국인은 협동력이 부족하다. 그러나 근 백 년에 걸쳐 힘차게 진행됐던 '국민성 개조 운동'의 효과는 결코 만족스럽지 못했던 것 같다. 현대사에서 국민성 개조는 오히려 정반대의 효과만 낳은 것으로 보인다. 문화혁명은 상호 신뢰의 힘을 더욱 꺾어버려 서로 시기하고 경계하는 모습만 드러냈으며, 사람들은 이상.숭고.순결 같은 단어들을 경원시했다"고 지적했다.
"한국인의 본성은 오염되지 않아"
반면 저자는 한국인의 국민성을 높게 평가했다.
"칭하이의 롱양사에서 처음으로 황허의 상류를 보았다. 그곳에서 나는 천 리를 흘러오고도 바닥이 보일 만큼 맑은 황허의 모습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다만 하류로 내려갈수록 척박한 땅을 만나고 많은 지류들이 함께 모이면서 결국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탁류가 된 것이다. 중화민족 역시 그 상징인 황허와 마찬가지로 오랜 역사를 거치면서 초췌해지고 많은 것들에서 순결함을 잃었다.
나는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한국은 황허 상류의 한 줄기를 끊어다가 한강에 부었다'. 길이는 짧고 흐름은 빨라서 한강의 대부분은 아직도 맑고 푸르며, 바다 근처까지 가서야 조금 오염되는 수준이다. 한국 사람과 접촉을 해보면 그들에게서 중국 춘추시대 사람들의 기질을 볼 수 있다. 그들은 단순하고 솔직하며 강하며 의리를 목숨보다 중시한다. 본성이 그다지 오염되지 않은 것이다."
저자는 또 중국대륙을 휩쓸고 있는 '한류 열풍'에 대해 나름의 분석도 곁들였다. 한류의 대표격이라고 할 수 있는 한국 드라마가 중국인들을 사로잡는 가장 큰 이유로 저자는 "사람의 마음이나 심성을 직접 겨냥하여 사랑.가족애.우정의 3대 주제로 인생의 희비를 이야기하고 건강하고 밝은 분위기로 삶의 진실한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또 그는 "중국의 문화작품들은 대체로 지나치게 저속하지 않으면 지나치게 심오하다. 그래서 평범한 인생의 소박한 미에 대해서는 표현할 가치가 없다고 보는 것 같다"면서 "한류의 일등 공신이라 할 수 있는 한국 드라마는 아주 평범하다. 극의 전개가 실제의 삶과 동떨어져 있지 않다"고 지적했다.
일본의 극우외교평론가 가세 히데아키가 가짜 한국인 필명으로 지난 93년 써낸 <추한 한국인>과 달리, 최근 중국의 권위있는 지식인이 우리가 간과하고 있는 한국인의 우수성을 극찬한 책이 출판돼 화제가 되고 있다.
중국작가협회 회원으로 <천년패론-역사를 읽는 또 다른 방법> 등의 저자인 장홍지에(張宏杰)가 쓴 <중국인은 한국인보다 무엇이 부족한가>(북폴리오 간)가 바로 그 책이다.특히 저자는 과거 한 번도 한국에 이기지 못해 '공한증(恐韓症)'까지 앓고 있는 중국 축구를 예로 들며 한국을 바라보는 등 중국인들의 생생한 느낌을 전하고 있다.
실제로 이 책에는 우리의 현실을 모르는 '과찬'으로 보이는 대목들이 적지않지만, 좀처럼 스스로 자신들의 문제를 인정하지 않고 '중화인'으로 자부해온 중국인들의 달라진 인식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주요내용을 소개한다.
"중국축구의 공한증은 '정신력' 차이에서 비롯"
우선 저자는 중국의 축구 '공한증'부터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저자는 체력과 기술에서는 별 차이가 없지만 '정신력' 차이가 한국축구에 번번히 지는 이유라고 주장했다. 저자에 따르면, 중국의 프로선수들은 공 하나에 목숨을 걸지 않는다. 반면 한국 선수들은 명예를 위해 축구를 하고 축구를 자신의 생명처럼 여겨 승리를 위해선 경기장에서 죽어도 상관없다는 각오로 시합에 나선다.
중국 선수도 시합에 지면 굉장히 안타까워한다(상금에 대한 미련도 포함해서).하지만 하룻밤만 지나면 이미 지난 일로 여기도 다시 평상심을 되찾는다. 하지만 한국인들은 치욕스런 패배에 눈물을 흘리며 한숨도 자지 못할 것이다. 바로 이렇기 때문에, 인구는 중국의 30분의 1, 땅은 중국의 1백분의 1밖에 되지 않는 이 작은 나라가 경기장에서는 계속해서 중국을 격파하는 것이다.
저자의 한.중 비교는 '대중질서'로까지 이어진다. 중국인들은 어릴 적부터 어떻게든 손해를 보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배우며 자란다. 중국의 대학 식당에서는 학생들이 복잡하게 한 데 엉켜서 밥을 탄다. 그러나 한국 학생들은 질서정연하게 줄을 서서 식권을 직접 식권함에 넣고 밥을 타간다.
한일월드컵 때 한국 축구팬들은 경기장에서 복장과 구호를 통일하여 수만 명이 거대한 붉은 물결을 이루며 '대한민국'을 외쳤다. 하지만 중국의 축구팬들은 전체적으로는 결코 적지 않은 숫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사오십 명씩 따로 모여 응원을 했다. 복장도 구호도 제각각에 서로 힘을 합하지 못하고 혼잡한 모습만 보였다. 경기가 끝난 후 한국 축구팬들은 자기 주변의 쓰레기들을 모두 주워서 돌아갔다. 그러나 중국 축구팬들이 떠난 자리에는 쓰레기가 수북했다. 쓰레기들 사이에는 작은 오성홍기도 수없이 많았다.
수단방법 가리지 않는 '실용주의자'들이 중국 망쳐
<중국인은 한국인보다 무엇이 부족한가>(북폴리오 간) ⓒ프레시안
저자는 "중국 민족이 심각한 결점을 갖고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는 한 가지 예만 들어보면 바로 알 수 있다"면서 "중국 내의 크고 작은 도시들을 다니다 보면 가장 눈에 띄는 것이 거리마다 걸려 있는 갖가지 '증명.감정' 광고판들이다. 거리의 담장에는 가짜 물건을 취급하는 사람과 연락을 취할 수 있는 방법이 버젓이 적혀 있다. 세계 어느 나라를 가도 이런 광경은 보기 힘들 것"이라며 가짜가 판치는 중국의 현실을 부끄러워 했다.
저자는 이어 이러한 현실의 원인을 '굴곡진 역사'가 만들어낸 '실용주의'에서 찾았다.
주변 민족들이 아직도 깊은 잠에 빠져 있을 때 중국은 이미 사상적으로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좋은 것은 오래가지 못했다. 겉모습은 허약하면서도 가슴은 냉혹했던 영정(진시황의 본명)이라는 남자가 무모하게 칼을 휘두르며 중국의 청춘기를 너무 빨리 끝내버렸다. 사람들에게 웅재와 대략을 지닌 인물로 비쳤던 진시황은 폭력에 기초한 통치법으로 모든 사람들은 노예로 부역자로 자신의 어가를 끄는 가축들로 만들어버렸다.
중국인의 인격 전체가 무참히 짓밟히고 인간의 존엄성은 완전히 꺾였다. 이런 엄혹한 사회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실용주의자'였다.
한나라 고조 유방이 전형적인 인물이다. 초나라와의 싸움에서 대패한 유방은 자식들과 모사 등공만 데리고 수레를 타고 달아났다. 수레가 더디게 가자 유방은 몇 번이나 두 아이를 밀어 떨어뜨렸다.그때마다 등공은 아이들을 다시 수레로 올렸다. 항우가 유방의 아버지를 죽여 육젓을 담가먹겠다고 엄포를 놓았을 때도 유방은 피식 한 번 비웃으며 육젓을 담그면 자기에게도 꼭 나눠달라고 되받아쳤다.
사서는 유방에 대해 "책읽기는 좋아하지 않으나 성격이 활달하고 계략짜기를 좋아하며 남의 말을 잘 들어주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워낙 친화력이 좋아 문지기나 병사들도 한 번만 그를 보면 바로 옛 친구처럼 느꼈다. 그러나 그는 천하를 평정하자마자 옛 은혜를 저버리고 자기를 위해 목숨까지 내놓았던 전우들을 살육한 사람이기도 했다. 거친 말만 달고 살던 이 건달의 승리는 항우 방식의 고귀하고 엄숙한 이상주의가 이미 대통일 후의 중국에 맞지 않음을 선포하는 것이었다. 그때부터 임기응변에 능하고 수단을 가리지 않는 비열한 무리들이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숱한 외침속 굴종의 정신 확산"
진한 시대 이후 중국에서는 왕도와 패도를 함께 쓰는 통치제도가 갈수록 탄탄하게 자리를 잡았다. 중화문명은 주위의 문명을 이끌고 중국 인민들의 가슴도 대국의 호방함과 자신감으로 충만해 갔다. 이런 자신감이 최고조에 이른 때가 당나라 때의 성당(盛唐)이다.
중국 역사에서 가장 건강한 인격을 지닌 황제 당태종도 이 시기의 사람이었다. 위대한 시인 이태백도 성당 때 등장했다. 아니 성당이기 때문에 등장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표일하고 호방한 이백의 시풍은 당시의 기백과 분위기를 그대로 담고 있다.
그러나 결국은 재앙의 연속이 이 땅의 숙명이었다. 당나라 이후 천년 간 중국 대륙은 수시로 왕조가 바뀌고 끊임없이 외적의 침입을 받았다. 이런 중국의 운명은 중국인들의 심리와 성격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중국인의 자존심과 자신감은 본래 충효를 근본으로 하는 도덕에 기초한 것인데, 왕조가 바뀌면서 충의는 꺾이고 투항이 장려되는 상황이 됐다. 황위가 주마등처럼 바뀌면서 예전에 추앙받던 정의감은 이제 조롱거리가 되고, 점점 많은 사람들이 이전에 가졌던 믿음이나 진지함을 잃어 갔다.
더 놀라운 일은 그 후에 일어났다. 송나라 왕조가 무너진 후 고개숙인 송나라 조정과 백성들 앞에 보무당당하게 나타난 정복자는 줄곧 중원에 복종해 왔던 노린내 나는 오랑캐 유목민이었다. 중원 사람들에게는 그야말로 엄청난 정신적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몽고의 철기병들이 야만스럽게 백성들을 유린하는 상황에서 중원 대국의 백성들은 하루아침에 최하층민으로 취급되는 치욕을 당하며 이후 백여 년 동안이나 몽고 귀족들의 폭정을 받아들여야 했다.
만주족들의 남하 이후에는 더 심했다. 부모에게 물려받아 함부로 훼손할 수 없는 머리카락을 정수리까지 깎아 변발로 만들어서 쥐꼬리처럼 늘어뜨려야 했기 때문이다. 굴욕을 참으며 구차하게 살아가는 상황에서 건강한 인격이 유지되기는 힘들다. 갈수록 많은 사람들이 영혼과 몸의 분열에 익숙해져 갔다. 예를 들어, 장렬하게 죽은 것보다는 비열하게라도 목숨을 부지하는 것이 낫다, 내 얼굴에 침을 뱉어도 저절로 마르기를 기다린다, 자기집 앞의 눈만 쓸고 남의 집 지붕의 서리는 상관 않는다는 식의 사고들이 그것이다.
"독도 지킨 한국의 홍순칠이 부럽다"
그러니 항일전쟁 때 그토록 많은 매국노들이 들끓은 것이 순전히 우연일 뿐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저자는 "중국은 항일전쟁 때는 안중근 같은 인물을, 항일전쟁 후에는 홍순칠 같은 인물을 배출해내지 못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특히 최근 독도분쟁이 재연되고 나서야 국내에서도 그 존재가치를 재인식하기 시작한 홍순칠 독도의용수비대장을 중국인 저자가 극찬한 대목은 우리에게 부끄러움을 안겨주기까지 한다.
"한국전쟁 와중이던 1953년 5월 일본의 우익인사가 독도에 올라가 푯말을 세우자 당시 스물 세살의 한국 청년 홍순칠은 전쟁 기간이라 무기의 관리가 소홀한 틈을 타 불법으로 총을 사고, 열혈 청년 몇 명을 모아 바다 건너 독도에 올라 일본인들을 쫓아내고 태극기를 꽂았다. 이후 홍순칠은 3년8개월 동안 독도를 지켰다. 그의 일기에는 일본의 군함이나 어선과 대치한 상황이 빼곡히 기록돼 있다. 1956년 종전 후 한국 정부가 해양 수비대를 파견하자 그제야 홍순칠은 신성한 국토 수호의 대업을 마쳤다. 한국 정부는 그의 불법 행위를 전혀 탓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훈장을 하사하며 그의 애국적인 행동을 널리 알렸다."
"청렴한 관리는 도태되게 마련"
역대 중국의 관료사회에서는 "청렴한 관리는 도태되게 마련"이라는 말이 그대로 받아들여졌다. 중국인들은 '중용'이나 '원만함'에 신경을 많이 쓴다. 모난 데가 없는 사람이라야 어디서든 환영받을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유방이나 주원장이나 서태후처럼 냉혹한 심장을 가지고, 의리를 버리고, 배신을 일삼으며,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일수록 성공하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이런 사람들은 누구보다도 인자하고 의롭다는 인상을 심어주는 뛰어난 배우의 소질을 갖고 있어야 했다. 반면 솔직하고 자애로운 사람일수록 고초가 컸다.
사실 제왕들의 후안무치함과 파괴본능 때문에 인의도덕이나 삼강오상의 가치는 진작부터 타격을 입어왔다. 지난 역사에서 수도 없이 속아왔다. 그래서 어떤 것이든 쉽게 믿지 못하며 사람들 사이의 믿음도 그만큼 두텁지 못하다. 황제는 공신들이 황위를 찬탈하지나 않을까 전전긍긍하며 그들을 다 없애버려야 비로소 마음이 편해졌다. 가장 인자했다는 황제 이세민도 현무문에서 자기 형제들을 죽인 후 그 아들들까지 무참하게 죽였다.
저자는 "그래서인지 중국인은 협동력이 부족하다. 그러나 근 백 년에 걸쳐 힘차게 진행됐던 '국민성 개조 운동'의 효과는 결코 만족스럽지 못했던 것 같다. 현대사에서 국민성 개조는 오히려 정반대의 효과만 낳은 것으로 보인다. 문화혁명은 상호 신뢰의 힘을 더욱 꺾어버려 서로 시기하고 경계하는 모습만 드러냈으며, 사람들은 이상.숭고.순결 같은 단어들을 경원시했다"고 지적했다.
"한국인의 본성은 오염되지 않아"
반면 저자는 한국인의 국민성을 높게 평가했다.
"칭하이의 롱양사에서 처음으로 황허의 상류를 보았다. 그곳에서 나는 천 리를 흘러오고도 바닥이 보일 만큼 맑은 황허의 모습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다만 하류로 내려갈수록 척박한 땅을 만나고 많은 지류들이 함께 모이면서 결국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탁류가 된 것이다. 중화민족 역시 그 상징인 황허와 마찬가지로 오랜 역사를 거치면서 초췌해지고 많은 것들에서 순결함을 잃었다.
나는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한국은 황허 상류의 한 줄기를 끊어다가 한강에 부었다'. 길이는 짧고 흐름은 빨라서 한강의 대부분은 아직도 맑고 푸르며, 바다 근처까지 가서야 조금 오염되는 수준이다. 한국 사람과 접촉을 해보면 그들에게서 중국 춘추시대 사람들의 기질을 볼 수 있다. 그들은 단순하고 솔직하며 강하며 의리를 목숨보다 중시한다. 본성이 그다지 오염되지 않은 것이다."
저자는 또 중국대륙을 휩쓸고 있는 '한류 열풍'에 대해 나름의 분석도 곁들였다. 한류의 대표격이라고 할 수 있는 한국 드라마가 중국인들을 사로잡는 가장 큰 이유로 저자는 "사람의 마음이나 심성을 직접 겨냥하여 사랑.가족애.우정의 3대 주제로 인생의 희비를 이야기하고 건강하고 밝은 분위기로 삶의 진실한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또 그는 "중국의 문화작품들은 대체로 지나치게 저속하지 않으면 지나치게 심오하다. 그래서 평범한 인생의 소박한 미에 대해서는 표현할 가치가 없다고 보는 것 같다"면서 "한류의 일등 공신이라 할 수 있는 한국 드라마는 아주 평범하다. 극의 전개가 실제의 삶과 동떨어져 있지 않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