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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지국을 씹으며

김종렬(09) 작성일 07-02-13 14:03 9,555회 7건

본문

설날이 얼마 남지 않아선지, 고향마실 여기저기서 소 잡는다고 난리다.
비록 불법이긴 하지만, 이맘때나 즐길 수 있는 또 하나의 오래된 관습이다.
지지리도 가난했던 어린 시절, 고깃국이래야 제삿날 또는 명절이나 잔칫날이나 되어야 맛보던 귀한 음식이 아니던가. 더군다나 소고기는 당시의 형편으론 더더욱 귀했다.

으레 소 잡는 날, 마실은 온통 잔지 분위기였다. 고기는 국거리나 산적으로 쓰기 때문에 구워 먹을 엄두도 못 내고, 대신 피와 내장에 대파 숭숭 썰어 넣고 가마솥 철철 넘치게 푹 삶아낸 선지국은 그야말로 별미 중 별미였다. 동네 아이 어른 다 모여 한 양푼씩 들고 아무데고 퍼질고 앉아 입술 입천장 데어가며 퍼먹던 그 맛이란 정말이지 기가 막혔다.

이어 어른들 사이엔 댓병 소주가 몇 사발 돌고 얼큰하게 취기가 오르기 시작하면,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장단이 일고 어깨가 들썩이고 두둥실 춤사위가 벌어졌던가. 어느새 꼬맹이들까지 합세해 어른들 바짓가랑이 사이로 더덩실 팔을 휘젖고...가마솥엔 연신 더운 김이 식을 줄 모르고, 마당 한가운데 피어오르던 벌건 장작불의 따슨 불기운이 참 좋았다. 아마 똥개도 그 날만큼은 포식을 했었지. 그 날 밤, 집으로 향하던 아버지의 등뒤에서 풍겨오던 술냄새가 좋았다. 그 술냄새 너머 새어나오던 흥얼거림과 콧노래가 참 듣기 좋았다.

그러나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 그 선지국 맛이 아니다. 분위기도 아니다. 왜 일까? 혹여 발각이 나 혼쭐날까 두려워 바깥 동정 살피기에 급급하고, 제각기 한 모가치씩 싸 들고 사라지기 바쁘다. 그 때에 비해 모든 것이 풍요로운데 눈치 보기 바쁘고, 연기 피우기가 두렵다.

사람들이 그립다. 그때 그 사람들이 그립다. 따지고 보면 많은 사람들이 마을 떠났고, 세상을 떠났다. 물소리 새소리 바람소리 여전히 마을을 감싸는데, 떠난 사람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앞 개울가 버들강아지는 어김없이 봄을 전하지만, 그 속에 그 사람들은 돌아올 줄 모른다. 무청 같은 시퍼런 새벽을 가슴에 안고 장에 나가 숯 팔고 나뭇단 팔던 그 아제들,  산나물 한 보따리 이고 들고 온 산천을 줄달음치던 그 아지매들 안 보인다. 추수가 끝난 논바닥에 종일 엎드려 흘린 이삭을 줍던 그 할매들 보이지 않는다.

사람들 떠난 고향은 설이 와도 설 같지 않다.
누가, 그 사람들 보지 못했나요. 누가, 우리 마실 사람 모르시나요.
올 설엔 그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도록 좀 찾아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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