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이호(11)
작성일
08-01-04 12:10 9,892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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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여년전 까까머리땐 성적 경쟁
지금은 모교에 기금 더 내기 경쟁
전북 이리고 20회 동기회, 1억5000만원 기부
“돈이 많아서가 아니라 후배 돕자는 마음으로”
재학생과 멘토관계 맺어 수업료 별도 지원도 익산=김경은 기자 eun@chosun.com
입력 : 2008.01.04 02:12
전북 이리고 20회 동기회, 1억5000만원 기부
“돈이 많아서가 아니라 후배 돕자는 마음으로”
재학생과 멘토관계 맺어 수업료 별도 지원도 익산=김경은 기자 eun@chosun.com
입력 : 2008.01.04 02:12
- 지난 12월7일 오후 전북 익산시 남중동1가 이리고등학교(교장 김상현) 교정. 중년신사가 된 이 학교 졸업생 4명이 까까머리 후배들과 함께 운동장에 섰다. 졸업생들은 30년 전 생물시간에 심었던 히말라야시타 나무 예닐곱 그루를 보며 “참 많이 자랐구나. 우리가 리어카에 묘목 싣고 와서 장난 치며 심었던 것들인데…”라고 했다.
누군가 말했다. “10년 후엔 운동장에 잔디를 깔아주자. 200억이면 충분할 거야” “아, 그럼 지금보다 더 열심히 일하고 돈 벌어야겠네” “까짓 거 하면 되지! 안 그래? 하하하!”
이날 학교를 찾은 졸업생들은 이리고 20회 동기회(추진위원장 황승택) 대표들이다. 조선일보 ‘스쿨 업그레이드, 학교를 풍요롭게’ 캠페인에 동참, 학교 발전기금으로 모금한 1억5000만원을 전달하기 위해 모교를 방문한 것이다. 이들은 이외에도 2009년과 2010년에 각각 1500만원씩 3000만원을 더 모금해 기부하기로 약속했다.
“작년 5월 경기도 여주에서 졸업 30주년(1977년 졸업)을 맞아 1박2일 모임을 가졌을 때 서울·경기지역에 사는 20회 동문 30여 명이 모교에 발전기금 2억원을 전달하자고 결의했습니다.”
당시 즉석에서 박세룡(50) ㈜세광쉽핑 대표이사가 3000만원을 내겠다고 약속했다. 그러자 동기들 사이에 묘한 경쟁심이 스멀스멀 피어 올랐다. “아, 세룡이가 큰돈을 선뜻 내겠다는데 딴 녀석들이 가만 있을 수 있나요. 사나이 자존심이 있죠.” 고성천(49) 삼일회계법인 전무가 박 대표이사를 추격해 2000만원을 쾌척했다. 이에 질세라 조상욱(49) ㈜태림전설 대표이사도 2000만원을 냈다. 뒤를 이어 김영백(48) 대주회계법인 회계사, 조창곤(49) ㈜경진건축사사무소 대표, 송계석(49) 세무사, 강현상(50) 광희보일러 사장이 각각 1250만원씩 냈다. “이 친구들은 원래 1000만원씩 내기로 했는데 못 내는 애가 있단 말에 대신해서 250만원씩 더 낸 겁니다.” 나머지 동문들도 각자 500만~1000만원가량을 내놓았다. 학창시절, 학업 성적을 놓고 경쟁했던 이들은 정확히 30년 만에 어느 누가 후배들을 더 아끼고 사랑하는지를 놓고 선의의 ‘발전기금 내기’ 경쟁을 벌였다. 순식간에 1억5000만원이 쌓였다.
- 후배들을 위해 모금한 1억5000만원을 전달하려고 지난 12월 전북 익산의 모교를 방문한‘이리고 20회 동기회’대표들이 후배들과 함께 교정에서 활짝 웃고 있다. /안호영 객원기자 hoyoungan1@chosun.com
- 황승택(49) 추진위원장(국정개혁연구소장)은 “우리가 돈이 많아서 낸 게 절대 아니다”라며 “어린 시절 가난하게 살아 후배들 돕는 것을 모두가 보람으로 여기기 때문에 모금이 가능했다”고 말했다. 고성천 전무는 “친구들에게 일일이 전화를 걸어 기부를 독려했다. 모교를 전국 명문고로 업그레이드시키자는 데 의기투합한 결과”라고 덧붙였다.
동창들이 모은 돈은 김상현(61·8회 졸업) 교장에게 직접 전달됐다. 이리고는 이 돈으로 성적이 우수한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고, 축구부·태권도부 학생들을 후원키로 했다. 특히 전교생이 수강하는 방과후 심화학습 수업비를 이 돈으로 충당해 학생 전원이 무료로 심화학습을 들을 수 있게 했다. 김상표 교사는 “선배들이 심화학습 수업비를 전액 지원해주니까 학생들이 따로 학원에 갈 필요가 없다”며 “선배들 덕에 후배들이 마음 놓고 공부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이와는 별도로 20회 동문 10명이 1인당 150만원씩 갹출해 1500만원을 모았다. 졸업생 1명이 재학생 1명과 멘토(mentor)-멘티(mentee) 관계를 맺어 3년간 1년에 150만원씩 수업료를 대신 내주는 프로그램에 따른 것이다. 1999년 10여 명에서 시작해 현재 졸업생 70여 명이 참여하고 있다. 대학에 진학하면 입학금도 후원한다.
멘토로 활동 중인 김상현 교장은 “후배들이 안정적으로 공부할 수 있게 해주는 선배들이야말로 학교의 보배”라고 말했다. 2학년 국정근군은 “저 또한 후배들을 위해 가진 것을 나누는 선배가 되겠다”고 다짐했다.
발전기금을 전달한 뒤 교정으로 나온 선배들이 후배들을 향해 호령했다. “사회 나가서 첫 월급 받으면 150만원은 무조건 후배들을 위해 기부하는 거야! 알았지?” 후배들은 입을 크게 벌리고 목청껏 소리쳤다. “넷! 명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