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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조문기 선생님을 아십니까?

박창홍(15) 작성일 08-02-19 12:29 11,160회 3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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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행위매국노에 대한 강력저항하는 조문기 선생
 여명의눈동자(여명의눈동자)  | 2008-02-11 10:43  217 글자크기설정 : 크게 l 작게

 

12월 30일 조문기 선생“내 건강이 우리 민족에게 해가 된다면 하루라도 빨리 포기할 것이며, 우리 민족에게 이득(이로움)이 된다면 하루라도 빨리 건강해져야 겠습니다” 

 

 

<슬픈 조국의 노래>조문기 선생을 살아생전 찾아뵈어야 하는 이유


“엄밀히 말하면 8·15는 민족이 해방된 날이 아니라 친일파가 해방된 날이다. 일제를 주인으로 떠받들던 친일파 주구들이 제 주인을 벗어나 이 땅의 주인으로 우뚝 선 날이다.”(<슬픈조국의 노래>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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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슬픈 조국의 노래> 표지
 
ⓒ2005 민족문제연구소



부일민족반역자인 친일행위매국노에 대한 강력저항하는 조문기 선생 

어차피 될 대로 다된 나라에서 민족이니 역사니 지껄여서 뭘 하랴 싶으면서도 친일파 문제 하면 입 다물고는 못 배기는 것은 아마도 조문기 선생(애국지사)을 빼놓아선 안 될 것이다.


백범 김구 선생.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썩음으로써 많은 새싹을 냄과 같이, 내가 암살되어 나와 같은 애국자들을 많이 낼 수 있다면 나는 그 길을 기꺼이 마다하지 않겠다." (30여 년간의 목숨을 건 독립운동의 여정을 끝내고 환국한 백범이 자신에 대한 암살 음모를 제보 받을 때마다 남겼던 유언이다.)

'20세기 가장 존경할 만한 민족지도자'를 선정함은 물론, 분단시대 북한의 주민들마저도 백범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 '백범정신 실천'을 위해 투신해 온 분들이 있다. 그 중에서도 선생이 유언한 대로 선생을 닮은 애국자들이 사시사철 우리 조국 강산에서 꽃처럼 피어난 가운데 우뚝선 조문기 선생.


현재 서울시 의회 건물 자리인 '부민관'에서 광복을 3주일 앞둔 1945년 7월 24일, 일제는 전세가 점점 불리해지자 패망 뒤 예기되는 후환을 미리 싹쓸이하기 위해 이 땅의 독립운동자와 민족지식인 2, 30만 명의 명단을 만들었는데 그 살인 하수인으로 뽑힌 자가 바로 박춘금이다. 친일 매국노 박춘금 주도로 부민관에서 일제 패망 직전의 마지막 발악으로 "아시아민족분격대회" 집회를 열고 있었다.


조문기 선생은 강윤국, 유만수 동지와 함께 식장에 잠입해서 사제 시한폭탄 두 발을 설치, 폭발시켰다. 이 의거로 19세인 청년 조문기를 김구선생을 위시한 민족의 지도자들이 총애 했음은 자명한 사실이다.(야인시대 방송 드라마에는 김두환의 승인과 협조로 한 것으로 묘사 됐는데 이것은 거짓임이 밝혔다.)


그러나 청년 조문기는 광복 직후 산속 깊은 곳(설악산 등)으로 은거하였고, 친일정권이 들어서자 ‘제2의 부민관 폭파 사건(남한만의 단독정부수립에 항의)’을 도모하다 발각되어 모진 고문과 고초를 격은 뒤 다시 경기도 화성의 고향으로 돌아가 '굶기를 밥 먹듯' 하는 초근목피의 세월을 살았다고 한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 지난 2003년 12월 29일 국회 예결위에서는 '친일인명사전' 편찬을 위한 기초자료 조사에 책정된 예산 5억원 전부를 폐기한 상태에서, 지난 2004년 1월 <친일인명사전> 편찬 성금 5억달성 기념 행사에서 조문기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이 인사말을 하고 있다. 

 

지금 한국의 사회를 대변하는 책 <슬픈 조국의 노래>


<슬픈 조국의 노래> 책에 나와 있는 내용 요점을 좀 더 열거하겠다. 남한만의 ‘단정(단독정부)’을 반대한 인민청년군 사건, 이승만 암살 정부전복 음모 조작사건, 성시백 사건을 비롯한 각종 사건에서 1948년 청년 조문기는 미군정과 이승만이 친일경찰을 내세워 남북협상파에 대해 체포·고문을 자행하며 단정 수립을 밀어붙이는 것에 대해 ‘경고’하려 했다.


옛 독립운동 동지들을 모아 북한산 6개소에 사제 시한폭탄을 설치키로 했다. 동시에 봉화를 올리고 서울 시내 고층빌딩 수십 곳에 “통일정부 이룩하자”, “단일정부 수립반대”, “미군은 물러가라” 같은 글이 적힌 펼침막 내건 뒤, 공중에 총 몇 발을 쏘는 평화(?)적 무력시위를 계획한 사건이었다.


단정수립 반대 무장세력이 있는 것처럼 시위를 벌여 이승만과 미군정의 노골적인 남북협상 방해를 견제하는 게 목적이었다. 하지만 이 계획은 조직에 숨어든 ‘프락치’ 때문에 들통이 나고 말았다.


체포된 청년 조문기는 경찰서 취조실에서 악명 높았던 친일경찰 김종원에게 고문당했다고 한다. ‘해방’이 됐다는 조국 땅에서 또다시 악랄한 친일 경찰한테 대못 박힌 각목으로 맞았다. 못이 몸속으로 쑥쑥 들어오는 소름끼치는 고문을 당하며 청년 조문기는 피눈물을 삼켰다. “분통 터지고 혀를 깨물고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고 회고했다.


“친일파들이 정관계, 문화, 예술, 언론, 교육, 종교 등 모든 분야에서 주류로 행세했고, 인맥과 후예들을 길러 철옹성같이 굳건한 성벽을 쌓았다.”(슬픈 조국의 노래 중에서)


8.15 광복절에는 행사장에 가지 않고 어디론가 사라지는 독립투사


우리나라에는 많은 독립운동가가 계시지만 평생을 독립운동하는 올곧은 마음으로 사신 분은 정말 흔치 않다. <슬픈 조국의 노래>를 출간해 뜻있는 후손들과 애국동지들의 심금을 울렸던 책.


"우리가 목숨을 걸고 찾으려했던 것은 분단된 조국이나 친일파 천국이 아니라고요. 친일파가 청산된 조국을 찾으려 한 건데, 이건 독립운동해서 나라 찾아 친일파한테 진상한 꼴이 된 거예요. 거기다가 나라도 분단되고···, 그러기에 남북통일과 친일파 청산이 이뤄져야 진정한 해방이고 독립이라 할 수 있습니다. ··· 그래서 나는 올해도 광복절날 기념식장에 가지 않을 겁니다."


다른 독립운동가들은 해마다 광복절이 되면, 기념식장에 초대돼 참석하고 청와대로도 초청돼 만찬 대접을 받기도 하지만, 초라하지만 올곧은 독립운동가 조문기 선생은 언제나 그런 자리를 피하셨다.


“해마다 되풀이 되는 일이지만 광복절은 광복회원들이 기다리는 잔칫날이다. 대접받는 날, 민족해방을 경축하는 날, 얼마나 가슴 벅차고 설레는 날인가? 하지만 알고 보면 거짓 환상이고 위선으로 가득 찬 날이다. 그래서 나는 안간다.”(슬픈 조국의 노래 중에서)


우리 '민족반역자처단협회' 동지들이 독립운동가 조문기 선생을 살아생전 병문안과 안부를 묻고 독립정신을 배우고자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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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문기 선생
 
ⓒ2005 민족문제연구소
 
 
조문기 선생에 대한 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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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1월 4일 조문기 선생 병문안 사진     © 플러스코리아
"경기 화성 매송면 송라리 출신의 독립운동가. 1942년 일제의 징용에 끌려가 일본 천기공장(川崎工場)에서 3년간 가혹한 노동으로 시달리던 중 공장이 폭격을 당하자 귀국했다.

그는 유만수(柳萬洙)·강윤국(康潤國)·권준(權俊)·우동학(禹東學) 등의 청년을 동지로 규합, 항일독립운동을 모의했다. 그는 1945년 7월 24일 서울 부민관(府民館) 에서 친일분자(親日分子) 박춘금이 주도하는 대의당(大儀黨) 주최로 일본·조선·만주·중국 등 어용정권의 대표들이 모여 아세아(亞細亞)민족(民族)궐기대회를 개최한다는 <경성일보>의 보도를 보게 되었다.

조문기(趙文紀)를 비롯한 동지들은 이를 습격하기로 결의하고, 폭탄뇌관을 구입하는 등 준비를 서둘렀다. 그리하여 7월 24일, 대회장 부민관(府民館)로 들어가 대회가 한창 진행될 때 사제폭탄을 단상으로 던져, 친일분자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장내는 삽시간에 쑥밭이 되고, 장내의 친일분자와 일본 경찰·헌병 등 여럿이 쓰러졌으나 박춘금(朴春琴)은 무사히 도망치고 말았다.

이때 조문기(趙文紀)를 비롯한 강윤국(康潤國)·유만수(柳萬洙)등은 태극기를 펴들며 “조선독립만세!”를 부른 후 “일본은 망한다. 젊은이들이여, 징병(徵兵)을 거부하자!”고 외쳤다. 이들은 곧 피체되어 고문을 당한 끝에 복역 중 1945년 8월 15일 해방된 후 석방되었다. 1982년 건국포장이 수여되었다." 
 
"투쟁만 하다 사라집니다. 여러분과 함께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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