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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로 읽는 울산유사(153)]IOC위원 꿈꾸던 고학생, 세계가 인정하는 육상지도자로125. 김기봉과 울산육상경기

사무국 작성일 15-06-01 14:18 11,635회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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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로 읽는 울산유사(153)]IOC위원 꿈꾸던 고학생, 세계가 인정하는 육상지도자로125. 김기봉과 울산육상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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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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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어머니 밑에서 힘들게 성장했지만
국가 장학생 뽑혀 체육·학업 병행
대학 졸업 후 울산서 교편 잡으며
학생 씨름단·육상 꿈나무 등 발굴
체육학부 교수·국가대표 코치활동도
제자들이 결성한 ‘고운회’ 모임 활발

▲ 고운 김기봉씨(왼쪽)가 1992년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올림픽 경기에서 MBC 해설위원으로 송인덕 아나운서와 함께 마라톤 경기를 해설하고 있다.

울산체육인들은 울산체육회 70년 역사상 가장 뛰어난 지도자로 고운(孤雲) 김기봉(金基鳳)씨를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고운은 육상분야에서 울산은 물론이고 전국에서 명성을 떨친 지도자였을 뿐 아니라 세계 육상연맹에서도 알아주는 육상 이론가다.

울산체육인으로 오랫동안 활동했던 설성재(82)씨는 “울산체육회 발전을 위해 그동안 헌신한 인사들이 많지만 체육회가 초기 경제적으로 어려웠을 때 자신의 호주머니 돈을 남몰래 체육회에 내어놓았던 박영출 전 울산문화원장과 1970~80년대 스파르타식 교육이 대세였던 시절 인성교육을 동반한 체육선수를 길러낸 김기봉씨야 말로 울산의 자랑스러운 체육인”이라고 말한다.

1941년 삼산에서 태어났던 고운은 일제가 삼산에 비행장을 건설하면서 마을이 비행장으로 편입되는 바람에 어릴 때는 온산읍 방도리로 이사를 가 이곳에서 자랐다. 아버님이 6·25전쟁에서 타계하는 바람에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야 했던 고운은 춘도초를 졸업했으나 중고등학교는 진학할 형편이 못되었다. 그러나 그는 당시 최영대 남창중학교 교장의 도움으로 남창중·고를 졸업했다. 최 교장은 울산 제헌 국회의원을 지냈던 최봉식씨의 아들로 일본 와세다 대학을 졸업했다.

초등학교 내내 학업이 뛰어났고 체력이 좋아 만능 스포츠맨이었던 그를 최 교장이 알고 도와주었다. 그는 초등학교 때부터 육상과 씨름에서 발군의 실력을 보여 온산읍에서 명성이 자자했다. 중·고 시절에도 체육은 물론이고 공부에서 다른 학생들의 추종을 불허하는 좋은 성적을 올렸던 그가 운동과 함께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았던 것은 IOC 위원이 되기 위해서였다. 남창고 시절 우연히 도서관에서 IOC위원들의 활동이 적혀있는 책을 본 그는 IOC위원들의 활동에 매료되어 IOC위원이 되겠다는 결심을 했다.

대학은 꿈도 꿀 수 없었던 그가 경북사대 체육과를 간 것도 IOC위원이 되겠다는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였다. 찢어지게 가난했던 가정생활이 풀리게 된 것은 그가 대학 1학년 때 정부가 실시한 장학생에 선발되면서다. 당시 정부는 가정경제가 어려운 대학생들을 상대로 장학생을 선발해 많은 장학금을 주었는데 이 시험에 당당히 합격했다. 그는 전국에서 유일한 체육학과 출신의 국가 장학생이 되었다.

당시 받은 장학금은 액수가 엄청나 그 돈으로 춘도에서 논을 3마지기나 샀다. 대학생활 틈틈이 아르바이트를 하면서도 IOC위원이 되기 위해 영어 공부도 열심히 했다.

그가 IOC 위원의 꿈을 접은 것은 대학 4학년 때였다. 이때 IOC위원이 공부만 잘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체육지도자로 그가 이룩하지 못한 것이 두 가지 있는데 첫째가 IOC위원이 못된 것이고 두 번째가 울산여고 출신의 육상선수 김순란을 세계적인 육상선수로 키우지 못한 것이다. 김순란은 그의 제자로 한국 신기록을 16번이나 경신해 방콕 아시아대회에서 금메달 유망주였지만 시합 직전 몸을 다쳐 4위에 머물고 말았다. 그녀는 현재 태화동 불고기단지에서 식당을 운영하고 있다.

체육지도자로서 역량은 대학 졸업 후 그가 울산농고에 오면서 나타나게 된다. 1965년 울산농고에 온 그는 체육시간을 통해 기량 있는 씨름 선수를 찾아내어 씨름단을 창단하고 1966년 경남도 대회에서 씨름의 명문 마산상고를 물리쳤다. 그리고 10월 서울에서 열린 47회 전국대회에 참가, 준우승을 했다. 이때 참가한 선수가 김병윤, 김문렬, 김정대, 배병천, 서문수였는데 결승전은 장춘체육관에서 영신고와 붙었으나 심판의 오심으로 우승을 놓쳤다. 이때 재경 향우회의 환영은 대단했다.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은 당시 울산 용잠 출신의 허용만 국장을 선수단에 보내어 선수들을 격려했다. 이후 울산농고 씨름단은 1967년 48회 전국체육대회에서 3위. 1968년 49회 전국체육대회에서 2위를 차지해 기염을 토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울산에서 육상연맹이 결성된 것이 1968년이고 이후 꾸준한 선수관리와 양성으로 울산시는 경남도 체육대회 육상분야에서 12년간 연속 우승했다. 1970년에는 학성고가 개교하면서 이필우 교감의 요청으로 학성고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게 된다. 학성고에서도 발군의 실력을 과시해 1971년 10월 서울서 열린 52회 전국체육대회에 박임준 선수가 ‘주고도’ 부문에서 1위 성적을 올렸고 53회 전국체육대회에서는 김병윤 선수가 10종경기에서 한국 신기록을 수립했다.

이외에도 차용범, 서문길 등 기량있는 선수를 많이 발굴해 이들이 전국대회에서 한국 신기록을 여러 번 수립했다. 조련사의 명성이 울산교육계에 알려지면서 울산교육장으로 울산여고 학생들도 방과후 학성고로 데리고 와 훈련을 시켰다. 그가 울산여고 출신의 김순란 선수를 발굴한 것이 이 때였다.

학성고에서 활동하는 동안 당시 김호식 교장과 마찰도 심했다. 김 교장은 그에게 여고생들을 학성고에 데리고 와 훈련시키는 것이 학성고 학생들의 수업에 방해가 된다면서 나무랐다. 김 교장은 또 그가 학생들에게 너무 강훈을 시키는 바람에 수업시간 중 학생들이 졸아 학업이 떨어진다면서 강도 높은 훈련을 지양할 것을 지시했다. 그러나 이런 어려운 여건에도 불구하고 그는 스스로 학업을 바탕으로 한 체육인이 되기 위해 노력했고 선수들 역시 훈련을 핑계로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도록 했다. 이런 활동으로 그가 울산에서 체육교사로 있는 동안 전국체육인들은 울산을 ‘혼성경기의 메카’로 불렀다.

그의 명성이 알려지면서 1981년 부산에 경성대학교가 개교할 때는 이곳으로 가 예술대학 체육학부 교수가 되었다. 학성고에 있으면서 동아대 대학원에서 체육학을 전공, 체육학 석사가 되었던 그는 1982년에는 한양대 대학원에서 ‘스포츠 트레이닝 과학에 대한 연구’로 이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경성대에서도 김태근, 최성신, 황선건을 발굴해 육상부문에서 한국 신기록을 5회나 경신하면서 체육교사로서는 힘든 교무처장과 학생처장, 교육대학원장을 맡았다.

국가대표 코치로도 여러 번 활동했다. 1978년 10월 방콕에서 열린 8회 아시아 경기와 1979년 5월 도쿄에서 개최된 3회 아시아 육상선수권대회에서는 혼성경기 코치로 참석했고 1976년 일본 야마구찌현에서 열린 육상경기에서는 총감독으로 활동했다. 1988년 서울 올림픽과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1993년 3월 개최된 64회 동아국제마라톤 대회와 이해 10월에 열린 47회 조선일보 국제마라톤 경기에서는 MBC 해설위원으로 참석했다. 그는 이중 특히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황영조 선수가 우승할 때 한 중계를 잊지 못한다.

▲ 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 전.경상일보 논설위원

그가 울산체육 발전을 위해 마지막 한 일이 울산스포츠과학중고등학교 설립에 참여한 것이다. 고운은 당시 김상만 교육감의 요청으로 울산스포츠과학중고등학교 설립 추진위원으로 활동했는데 학교 명칭을 ‘울산스포츠과학중고등학교’로 정한 것도 그였다. 당초 김 교육감은 학교 명칭을 타 지역처럼 ‘울산체육중고등학교’로 정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고운은 학생들이 체육에만 전념하지 않고 인성교육과 함께 학업을 바탕으로 한 체육인이 되어야 한다면서 교명을 ‘울산스포츠과학중고등학교’로 정할 것을 주장했다.

울산육상의 산 증인인 그는 1965년부터 1981년까지 16년 동안 자신이 울산에서 체육교사로 있으면서 키운 체육선수 명단과 기록을 아직 갖고 있다. 이 노트를 보면 그는 울산에 있는 동안 육상부문에서 한국 신기록 30회, 부별 신기록 16회, 대회 신기록 104회를 올렸다. 울산에서 키운 선수만 해도 30여명이 넘어 이들이 ‘고운회’라는 이름으로 매달 모임을 갖는데 대학을 은퇴한 후 부산에 머물고 있는 그는 가끔 이 모임에 참석한다. 그는 “이채홍 울산 강북교육장처럼 체육선수로 출발했던 제자들이 운동을 하면서도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아 오늘날 울산교육계의 지도자가 되어 있는 것이 자랑스럽다”는 말을 했다.

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 전.경상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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