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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과 사진으로 보는 한국사(많은 감상바람)

이성호(07) 작성일 09-01-08 18:47 11,255회 1건

본문

1. 조선사회 지주제 - 김홍도 <벼타작> 그림
(단원 김홍도 탄신 250주년기념특별전 도록, 1996, 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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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도(1745-1818:영조 21-순조18)의 풍속화첩에 실려있는 그림이다. 볏짐을 지고 오고, 통나무에 태질을 하여 벼를 털고, 갈퀴질을 하는 농민들의 모습이 실감나게 그려져 있다. 한쪽에서는 마름인지 지주인지 술병을 옆에 놓고 장죽을 입에 문채 감시를 하고 있는데도 타작하는 표정들이 밝다. 봄부터 논갈고 씨뿌리고 김매다가 수확할 때, 그동안 힘들었어도 타작할 때는 신바람이 난다. 그러나 타작한 뒤 수확의 반이상을 지대로 바쳐야 하는 것이 농민들의 현실이었다. 그래서 농민들은 설렁 설렁 태질을 하여 벼이삭이 붙은채로 갈퀴로 끌어 모아 북데기로 묶어놓았다가 알곡을 정액이건 분반이건 나누어 지대로 바친뒤 늦가을 다시 털어 자기몫을 늘리기도 하였다.
2. 조선사회 신분제 - 김득신 <노상현알>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민족대백과사전 13 , 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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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반이 종을 앞세워 나귀를 타고 나들이를 하고 있다. 상민은 허리를 땅에 닿을 만큼 굽혀 굽신거리며 양반을 대하고 있다. 조선사회 신분제의 실상을 실감할 수 있는 그림이다. 이러한 지주제와 신분제를 타파하고 새로운 사회를 만드는 것이 조선후기 사회가 나가야 할 방향이었다.
3. 강화도조약 (1876)
(서문당, 사진으로 보는 독립운동 상, 1987,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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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6년 2월 11일부터 2월 26일까지 강화부 서문안의 진무영에서 계속된 조선과 일본 양측 대표의 회담 그림이다. 강화도조약으로 불리는 이 조일수호조규는 조선이 외국과 맺는 최초의 근대적 조약이다. 이 조약은 최외법권인 영사재판권, 조계 설정, 무관세무역, 일본화폐의 유통허용 등 일본의 일방적인 특권만을 규정한 불평등 조약이었다. 이 조약으로 조선은 부산을 비롯하여 인천과 원산을 차례로 개방하였다.
4. 임오군인폭동(1882)
(서문당, 사진으로 보는 독립운동 상, 1987,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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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오군인폭동 때 일본기를 들고 인천2으로 도주하는 일본공사관원들과 발사 위협에 쫓기는 군인들 모습.
1882년 6월 군인폭동은 개항 뒤 새로 만든 신식군인인 별기군과의 차별, 민씨정권의 부패로 제때 정해진 월급을 받지 못한 것이 동기가 되어 일어났다. 이 군인들은 시골을 떠나 서울로 올라와 근교에서 살면서 먹고 살 길을 찾아 군대에 들어간 빈민들이기도 하였다. 군인들은 잠시 왕궁을 점령하고 민씨정권을 내쫓았다. 일본공사관원들은 탈출하였다. 그러나 민비의 요청으로 출병한 청의 무력개입으로 진압되었다.
5. 미국에 파견된 해외사절(1883)
(서문당, 사진으로 보는 독립운동 상, 1987,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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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2년 5월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한 1년 후인 조선은 1883년 7월 8일 전관대신 민영익(1860-1914) 일행을 도미사절로 파견하였다. 사진은 최초로 서양문물을 돌아보고 돌와 찍은 도미사절 일행이다. 앞줄 왼쪽부터 통역관 로우엘, 홍영식, 민역이그 서광범이다.
조미수호통상조약에서 조선은 저율이긴 하지만 관세권을 인정받았으나 미국에게 '최혜국 조관'을 인정하였다. 그 뒤 1882년 9월에는 조선이 청의 속국임을 인정하고 치외법권 확대, 서울 양화진 개시와 내지통상권 허용, 연안무역권 허용, 홍삼수출에 대한 고율관세(30%) 부과 등 불평등한 내용으로 이루어진 '조청수륙무역장정'을 조인하였다. 조선정부는 1886년까지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등 구미열강과 불평등한 '통상조약'을 체결하여 구미 자본주의 국가에 문호를 열어 세계 자본주의 질서에 깊숙이 들어앉게 되었다.
6. 갑신정변(1884) - 김옥균(1851-1894)
(서문당, 사진으로 보는 독립운동 상, 1987,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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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규수가 지구본을 한번 돌리더니 김옥균을 돌아보고 웃으며 말하였다.
오늘에 중국이 어디 있느냐. 저리 돌리면 미국이 중국이 되며, 이리 돌 리면 조선이 중국이 되어 어느 나라든지 중으로 돌리면 중국이 되나니, 오늘에 어디 정한 중국이 있느냐.
이 말을 듣고 김옥균은 크게 무릎을 치고 일어났다. 이것이 갑신정변 폭발의 계기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박규수와 만나 세계를 논하면서 김옥균은 중세의 동양적 세계관인 중화주의적 사고에서 벗어나 근대적 만국공법적 세계관(이것도 서구 열강 중심의 세계관이긴 하지만)으로 인식을 전환하기 시작하였고, 중세적 조선을 정치 사회적으로 변혁하여 서양 문물을 수용하고 제도를 고쳐 근대국가를 수립하려는 꿈을 갖게 되었다.
당시 조선에 대해 의례적이고 형식적으로 상국 역할을 하던 청나라는 점차 조선을 실질적으로 소국화하려고 심하게 간섭하고 있었다. 민씨 정권은 부패하고 방만한 재정운용으로 나라 살림을 거덜냈다. 양반지주는 소작료로 농민 생산의 5~6할을 수탈하고, 청국과 일본 상인의 횡포에 농민이나 상인의 살림은 바닥이 났다. 김옥균등 양반 지주 엘리트들은 과감한 개혁없이 이대로는 나라가 지탱되지 못하리라는 것을 직시하였다. 변혁은 불가피했다.
김옥균은 1851년 2월 23일 충청도 공주군 정안면 광정리 농촌에서 안동김씨 김병태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김병태는 생계를 위해 천안읍 변두리인 원대리로 이사하여 서당을 차렸다. 옥균은 5살 때부터 아버지의 서당에서 한문을 배웠다. 7살 때 아버지의 6촌 뻘 되는 김병기(안동김씨 세도가에 줄을 대어 관직에 올라 서울 거주)의 양자로 들어가 서울 북촌에 거주하며 김홍집과 사귀게 된다. 양아버지가 강릉부사로가자 강릉에서 6년간 이율곡의 사당이 있는 서당에서 수학하다 1866년 서울로 돌아왔을 때는 학문은 물론이고 시문 글씨 그림 음률에 탁월하여 대원군과 조대비에게까지 알려졌다. 1872년 과거에 응시하여 장원 급제하였다.벼슬은 총망한 젊은이에게 주어지는 홍문관 교리까지 올랐다.
김옥균이 개화사상을 가지게 된 것은 20세 무렵인 1870년 무렵 유대치 박규수 등과 접촉하면서부터다. 이들은 김옥균, 홍영식(영의정 홍순목의 아들), 서광범(참판 서상익의 아들), 박영효(철종의 사위), 박영교(박영효의 형) 등을 지도하여 개화사상을 갖게 하였다. 김옥균등은 양반 중인 군인 상민 승려 등 신분을 초월하여 동지들을 규합하였다.국왕이 새 문물, 제도에 관심이 많은 것을 기화로 국왕의 신임과 총애를 얻는 데도 성공하였다.
외교기관인 외아문에 김옥균과 홍영식은 협판으로, 변수는 주사로 있어 국왕에게 외교에 대한 상주도 할 수 있고 외국 시찰의 기회도 많아 국제정세에 관한 견문을 넓혔다. 특히, 명치유신 이후 일본의 '문명개화'의 실상을 파악하고 일본 근대화의 정신적 지주인 후쿠자와 유기찌의 지도와 도움을 받게되었다.
당오전 등 악화를 남발하여 재정난을 타개하려는 민씨정권에 반대하여, 김옥균 등은 일본으로부터 차관을 얻어 개화정책을 추진할 자금난도 타결하고 정치자금도 충당하려 했으나, 민씨정권의 방해공작과 일본정부의 미온적 태도로 개화당은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다. 한편, 청국과 전통적인 종속 관계를 유지하면서 약간의 서양 문물을 받아들여 정권을 지키려는 민씨일파 집권세력은 일본의 명치유신적 개혁과 만국공법적 질서를 꿈꾸는 개화당 인사들을 위험시하였다. 김옥균은,우리들은 수년래 평화수단을 쓰면서 각고 진력하였지만 그 공이 없었을 뿐만아니라 금일에는 이미 사지에 들어가 있다. 앉아서 죽음을 기다릴 바에야 선수를 써야 한다.면서 서둘러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김옥균 등은 처음에 미국공사의 도움을 받고자 했다. 그러나 미국은 중국의 이권 침탈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던 때라 별반 신통한 이익이 없을 것 같은 조선문제에는 소극적 이어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어 일본공사에게 접근하여 일본공사관 병력을 동원하는 데 동의를 얻었다. 청국병사가 걱정이 되었으나 베트남을 식민지화하려는 프랑스와 청불전쟁을 벌이고 있어 상당수의 청국 병사가 빠져나간 사태여서 오히려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였다.
1884년 12월 4일 10시 경에 우정국 북쪽의 민가에 방화한 것을 신호로 거사는 시작되었다. 최초의 근대적 우정국 개국 연회에는 외국공사들과 민씨정권의 세력가들이 이미 거나하게 취하여 희희낙낙하고 있었다. 민비의 친조카 민영익이 칼을 맞고 맨먼저 쓰러졌다. 일본공사 다께조에는 200명의 군사를 이끌고 경우궁에 도착하였다. 변란의 소식을 듣고 입궐하던 한규직 이조연 민태호 민영목 조영하 등이 차례로 처단되었다.
정변을 일으킨 김옥균 등은 국왕에게 상주하여 신정권 수립에 착수하였다. 좌의정에 이재원, 우의정에 홍영식, 좌포도대장에 박영효, 우포도대장에 서광범, 호조참판겸 판서 서리에 김옥균, 병조참판에 서재필 등이 임명되었다.
이어서 '혁명정부'의 의도가 잘 나타난 정강 14조가 발표하여 청국과의 전통적 관계 단절, 문벌 폐지와 인민평등권 제정, 지조법개정(삼정문란 해결), 탐관오리 숙청, 근대적 경찰.군사제도 수립, 국왕 전제와 척족의 간섭을 배제한 내각제 수립 등을 천명하였다.
그러나, 이런 김옥균 등의 웅대한 꿈은 3일 천하로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궁궐의 무기는 녹슬어 총알 한번 쏘아볼 수 없었고, 일본공사는 청군이 들이닥치자 소극적으로 저항하다가 슬그머니 철수하고 말았다. 손쉽게 청군과 민씨일파는 정권을 되찾았다.
국왕을 따르던 홍영식과 박영교는 청군에 피살되었다.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등은 인천으로 도망쳐 간신히 일본배 '천세환'을 타고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일본에 도착한 김옥균은 정치적 박해와 살해 음모에 시달렸다. 먼 외딴 섬 소립원도나 북해도의 벽지로 끌려가 굶주린 연금 생활 10년을 와신상담하며 재기를 꿈꾸던 김옥균은 민씨일파의 자객 홍종우의 꼬임에 빠져 상해로 유인되어 1894 년 2월 22일 살해당했다.
갑신정변을 일으킨 김옥균 등 개화당 인사들은, 밖으로는 일본이나 미국의 협조하에 청국이나 서구열강의 간섭을 배제하여 최소한이나마 자주국가를 수립하고, 안으로는 봉건적 양반지주제의 폐단을 어느정도 고치어 지주,상인을 중심으로 한 자본주의적,부르조아적 개혁을 단행하려 한 것이다.
그러나,이들이 거사를 성공으로 이끌기에는 계급적,사상적 한계와 미숙성을 드러냈다. 양반지주 가문에서 태어난 그들은 농민을 비롯한 민중의 이익과 관련한 개혁은 생각지도 않았고, 민중을 동원하려 하지도 안았다. 반대로 전제군주인 국왕에 매달리고, 침략세력인 일본에 의존하였다. 청병을 과소평가하는 등 국제정세에 대한 인식도 부족하였다.
중세의 말기적 폐단과 양반.상인의 수탈에 신음하고, 일본.청국 상인의 횡포에 살림이 거덜난 민중은 개혁을 열망하고 있었다. 김옥균 등의 노력에 따라 민중은 혁명의 원동력이 될 수도 있었다. 이런 민중과의 단절은 외세의존적인 개화운동, 부르조아 개혁운동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다.(이수룡)
7. 갑오농민전쟁(1894) - 만석보유지비(萬石洑遺址碑)
(1994년 찍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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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고부농민항쟁의 직접 동기였던 고부군수 조병갑이 쌓은 보가 있던 곳에 세운 기념비다. 고부군수 조병갑은 정읍천과 태인천이 합류하는 동진강 상류에 민보(舊洑 또는 禮洞洑)가 있었는데도 농민들을 강제로 동원하여 하류에 다시 신보를 쌓게 하고 물세를 징수하였다. 그외에도 황무지에 과세하는가 하면 불효, 불목죄 등 애매한 죄목을 들어 재산을 빼앗는 등 온갖 폭정을 다하였다.
1894년 1월 10일 고부관아를 점령한 농민들은 무기고를 열어 무장하고 창고를 열어 식량을 나눈뒤 수탈과 탐학의 상징이었던 만석보를 파괴하였다.
이 비는 1973년 동학혁명기념사업회에서 정읍천과 태인천이 마주치는 동진강 상류에 세웠다. 보의 위치에 대해, 당시 태인천은 고부군 관할이 아니었게 때문에 만석보는 정읍천에만 걸쳐 있었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저쪽에 있는 작은 비는 1987년 10월 1일 세운 [萬石洑遺址淨化記念碑]이다. "이 자리는 1894년 동학농민봉기의 발단이 된 만석보유지이다. 반봉건 반외세의 기치를 세운 동학농민군의 자주정신은 우리의 민족운동에 큰 영향을 주어왔다. 선열들이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려던 높은 뜻을 겨레의 가슴속에 영원히 기리기 위하여 이곳을 정화하고 비를 세운다"고 비문이 씌여 있다. '정화', 전라북도지사 이름이 돌로 쪼아졌다.
1994년 농민전쟁 100주년을 맞아 비가 세워진 앞 둑을 넓히고 시멘트 블록을 깔아 단장을 한 모습이다.
8. 갑오농민전쟁 - 황토현비
(동학혁명 100주년기념 특별전시회 도록, 1994,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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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4월 7일 동학농민군이 전라 감영군과 보부상 부대로 이루어진 농민군 토벌부대를 맞이하여 대승을 거둔 장소를 기념하여 세운비다. 1963년 관주도의 [동학혁명 기념탑 추진위원회]가 구성되어 그해 10월에 이 [갑오동학기념탑]이 세워졌다. 1894년 농민전쟁을 기리는 최초의 탑이다.
9. 갑오농민전쟁 - 농민군 그림
(한길사,한국사-12, 1994,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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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군 그림은 1893년 10월 26일 창간한 일본의 천우협 기관지인 이륙신보(二六新報) 1894년 8월 11일자에 실려있다. 이륙신보사 주필 영복(鈴木)은 "동학당원들은 황색, 청색, 흑색의 띠로 각기 부서의 구분을 두었으며, 의복은 진한적색 마포로 해서 입었고, 등에는 화승총을, 허리에는 약통과 화승을 차고 있다"고 삽화를 설명하였다. 지휘관 모습은 8월 12일자에 실린 삽화다. 양산을 들고 칼을 찬 채 말에 타고 있다.
왼편 위쪽 도장을 '제중의인(濟衆義仁) 이라고 새겨진 동학당원의 인장'이라고 설명하고 있으나 '제중의소'의 잘못이다. 동학당원 인장이 아니라 1994년 봄부터 여름까지 농민군 지휘소를 지칭하는 지휘부 인장이다. 신문에는 동학당원의 印形이라면서 '濟衆義印'으로 표시하였다
10. 갑오농민전쟁 - 우금치 동학혁명군위령탑
(우리교육, 1990년 10월호,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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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에 세운 동학혁명군위령탑, '동학혁명'이 5.16과 유신으로 이어진다는 내용을 새겼다. "그러나 님들이 가신지 80년 5.16혁명이래의 신생조국이 새삼 동학혁명군의 순국정신을 오늘에 되살리면서 빛나는 10월유신의 한 돌을 보내게 된 만큼 우리 모두가 피어린 이 언덕에 잠든 그 님들의 넋을 달래기 위해 이 탑을 세우노니 ...... 서기 1973년 11월 11일 제자 대통령 박정희 글 이선근 글씨 양재한 동학혁명군위령탑 건립 위원회." 사진의 허연 부분은 5.16혁명, 10월유신, 대통령 박정희 부분으로 누가 망치질을 하여 지워버렸다.
11. 갑오농민전쟁 - '압송되는 전봉준 장군'
(서문당, 사진으로 보는 독립운동 상, 1987,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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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봉준 장군의 유일한 사진에 대하여 '압송되는 모습'으로 알려져 왔다. 압송되는 모습이라면 1894년 12월 2일 순창 피노리에서 서울로 오는 과정의 모습일 것이나 <동경조일신문> 1895년 3월 12일자 기사에 "이미 법무아문의 심판에 회부된다면 사형을 면치 못할 것임으로 그 용모만이라도 촬영하여 두고 싶다는 사진사의 청에 의해서 촬영이 허가되었다."는 내용이 있고, <대판매일신문>에 사진의 구도나 인물묘사가 거의 같은 삽화가 실려있다. 같은 장면을 사진사와 화사가 특별히 사진을 찍고 스케치하기 위하여 연출한 장면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동학혁명 100주년기념 특별전시회 - 이종학 소장 문헌자료전 참조)
12. 갑오농민전쟁 - 김개남비
(1994년 찍어 비 앞뒷면 합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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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농민전쟁 2대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인 김개남을 추모하는 사람들이 정성을 모아 농민전쟁 100주년을 앞두고 1993년 5월에 세운 비. 다음은 비문의 내용이다.
"우리 민족은 민중이 주인이 되고자하는 자랑스런 항거의 역사를 가지고 있으니 그위에 우뚝선 동학농민전쟁이 그렇고 그 지도자로 살다간 김개남 장군이 그렇다.
사천일백팔십육년 전라도 태인땅 지금실에서 도강김씨 대흠(대현)의 셋째 아들로 태어난 김개남 장군은 불꽃같은 의지로 보국안민과 척양척왜의 기치를 내걸고 나라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바쳐 싸우다 죽은 동학농민전쟁의 지도자 중 한사람이다. 어려서부터 의협심이 강해 민족의 앞날을 걱정하고 있던 김개남장군은 봉건왕조의 부패와 수탈로 민심이 흉흉하고 일본을 비롯한 제국주의 침탈로 나라가 위태롭자 사천이백이십칠년 삼월 전봉준 손화중 장군과 함께 국가의 안위를 좌시할 수 없어 억조창생의 뜻을 모아 의기를 들고 보국안민을 위해 사생을 맹서하는 창의문과 창생을 도탄중에서 건지고 국가를 반석위에 두고자 하는 격문을 띄우며 동학농민군을 이끌었다. 동학농민군은 황톳재와 황룡강 싸움에서 크게 이기고 갈재넘어 원평 금구를 거쳐 사월 전주성을 점령했다. 이어 전주화약을 맺은 뒤 김개남 장군은 남원성을 중심으로 집강소를 설치하고 전라좌도를 평정 폐정개혁을 추진했다. 이때 영주란 본명을 남쪽을 연다는 뜻의 개남으로 바꿨다. 그해 구월 이차기포때 관군의 요충지인 청주병영을 공격했으나 패하여 통한의 눈물을 삼키면서 태인으로 내려와 재기를 준비했다. 그러나 임병찬의 고발로 붙잡혀 십이월 전주성 서교장에서 목이 잘려 효시됐다. 그나이 마흔둘 시신도 거두지 못했고 따라서 무덤도 없다. 구천에 떠도는 그 고혼은 어디서 통곡하고 있는가.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난지 어언 아흔아홉해 그의 높은 뜻을 기리고 맺힌 한을 풀고자 뜻있는 사람들이 여기에 돌을 세우니 진흙속에 핀 저 연꽃이 더욱 아름답듯이 그의 넋은 역사를 비추는 횃불로 되살아 날것이며 찬란한 태양으로 이땅에 더욱 빛나리라.
사천삼백이십육년오월삼십일 김개남장군을 추모하는 사람들"
13. 갑오개혁(1894) - 군국기무처 그림
(한국정신문화연구원,한국민족대백과사전 3, 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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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국기무처는 갑오경장의 중추적 역할을 한 기관으로 정치.군사에 관한 일체의 사무를 관장했다. 봉건적 신분제적 농민수탈을 완화하고 민중의 사소한 불만을 해소시킴으로써 농민혁명을 예방하고 개화파 정권 중심으로 개혁을 추진하려던 기구였다. 의정부 산하 정책의결기구로 총재와 20인 이하의 회의원으로 구성되었다. 거기서 채택된 의안은 국왕의 재가를 거친 후 국법으로 효력을 발생하였다. 1894년 7월 15일 제1차 김홍집 내각이 성립되자 군국기무처 회의원의 다수가 내각의 대신.협판으로 임명되고 군사 경찰관계 최고책임자들은 당연직 회의원이 됨으로써 합좌기관적 성격도 가지고 개혁을 추진하였다. 군국기무처는 6월 25일에서 10월 1일까지 3개월 동안 210건의 제도개혁안 또는 정책건의안을 의결하고 국왕의 재가를 얻어 공포하였다. 주요한 내용은 의정부와 궁내부의 분리, 개국기년 사용, 문벌과 양반 상민 차별 혁파, 불법적 경제수탈 금지 등이었다.
14. 아관파천(1896)
(동아일보사, 사진으로 보는 한국백년, 1978, 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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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공관 문앞에서 대포까지 동원하여 무력시위를 벌이며 고종의 환궁을 요구하는 일본 군대.
1895년 10월 민비가 시해되고, 대궐을 위협당한 고종은 1896년 2월 11일부터 1년여 러시아 공관에서 거처했다. 민비시해로 일어난 1차 의병을 진압하려 지방으로 내려간 친위대의 부재를 이용, 신변에 위험을 느끼고 있던 고종을 러시아 공관으로 옮겼으며, 친러 내각이 성립되었다.
15. 독립문(1897)
(한길사,한국사-11, 1994,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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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협회가 주관하여 1896년 11월 21일 영은문을 헐고 독립문을 기공하여 1897년 11월 20일 준공하였다. 1904년 당시의 모습이다.
16. 정장한 대한제국 고종황제(1897)
(서문당, 사진으로 보는 독립운동 상, 1987, 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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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7년 10월 12일, 고종은 환구단에서 황제 즉위식을 거행하고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쳤다. 청국의 제후국과 같은 형식을 탈피, 완전 독립국임을 선언했다. 황제는 고종이 계속 즉위하고, 1907년 순종이 계승했으나, 1910년 8월 29일 일제의 무력점령으로 '대한제국'은 막을 내렸다.
17. 운산금광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민족대백과사전 16, 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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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안북도 운산군 북진읍에 있는 우리나라 최대의 금광산. 1896년 미국인 모스가 대한제국으로부터 기한 25년으로 운산군 일원의 금광구를 특허받게 되었다. 모스는 동양합동광업회사를 조직하고 황실에 자본주 100에 대한 25주를 주고 일시금 25만원을 헌납하였고, 또한 매년 2만 5천원을 현상하였다. 1910년 우리나라가 일본의 식민지로 침해당하자 일본의 광업에 대한 일원화 정책에 따라 다른 외국인 운영의 광산과 함께 운산광산도 1939년 일본인이 경영하게 되었다.
18. 러일전쟁
(서문당, 사진으로 보는 독립운동 상, 1987, 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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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 2월 8일, 인천에 상륙한 일본군 기고시(木越) 여단의 시가행진. 배낭이며 군장이 아직도 우리 눈에 익은 모습이다.
19. 시일야방성대곡(시일야방성대곡)
(한길사,한국사 11, 1994,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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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11월 17일 한일신협약(을사조약)이 조인된 뒤 11월 20일 장지연이 {황성신문}에 쓴 논설.
"이 날에 목놓아 통곡하노라. 지난번 이등박문이 한국에 왔을 때 어리석은 우리 인민은 서로 말하기를 이등은 평소 세 개의 솥발이 서로 의지해 안정하듯이 동양 삼국의 안녕을 스스로 걸머지고 주선하던 사람이니 이번에 온 것이 반드시 우리나라의 독립 기반을 굳게 다질 계책을 권하기 위함일 것이다 하여 인천항에서 서울까지 관민상하가 더할 수 없이 환영하였다.
그러나 천하에는 헤아리기 어려운 일도 많도다. 천만 뜻밖에 5조약이 무슨 연유로 제출되었는가. 이 조약은 우리 한국만이 아니라 동양삼국이 분열하는 조짐을 빚어냄이니 이등박문의 당초 뜻이 어디에 있었던가. 그러나 우리 대황제폐하의 강경하신 뜻으로 거절해 마지않으셨으니 이 조약이 성립되지 못할 것은 이등박문 스스로가 알아 파기할 것으로 생각했는데 아 저 개돼지만도 못한 소위 우리 정부의 대신이란 자들이 사사로운 영화를 바라 머뭇거리고 으름장에 겁먹어 떨면서 매국의 역적됨을 달갑게 여겨서 사천 년 강토와 오백 년 종묘사직을 남의 나라에 바치고 이천만 동포를 몰아 남의 노예로 만드니 저 개돼지만도 못한 외부대신 박제순과 각부 대신은 깊이 나무랄 것도 없지만 명색이 참정대신이란 자는 정부의 수상으로 단지 부(否)자로 책임만 때우고서 명예를 구하는 밑천으로 삼을 계획이었던가. 김청음(김상헌의 호)처럼 항서를 찢고 통곡하지도 못하고 정동계처럼 칼로 배를 가르지도 못하고서 뻔뻔스럽게 살아남아 세상에 다시 섰으니 무슨 낯으로 강경하실 황상폐하를 다시 뵈올 것이며 무슨 낯으로 이천만 동포를 다시 대할 것인가.
아 원통하고 분하도다. 남의 노예된 우리 이천만 동포여 살 것인가 죽을 것인가, 단군기자 이래 사천년을 이어온 국민 정신이 하룻밤 사이에 갑자기 멸망하고 말 것인가. 원통하고 원통하도다 동포여 동포여"
20. 문화계몽운동 각 학회의 회보
(서문당, 사진으로 보는 독립운동 상, 1987, 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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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아관파천(1896)
(동아일보사, 사진으로 보는 한국백년, 1978, 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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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공관 문앞에서 대포까지 동원하여 무력시위를 벌이며 고종의 환궁을 요구하는 일본 군대.
1895년 10월 민비가 시해되고, 대궐을 위협당한 고종은 1896년 2월 11일부터 1년여 러시아 공관에서 거처했다. 민비시해로 일어난 1차 의병을 진압하려 지방으로 내려간 친위대의 부재를 이용, 신변에 위험을 느끼고 있던 고종을 러시아 공관으로 옮겼으며, 친러 내각이 성립되었다.
15. 독립문(1897)
(한길사,한국사-11, 1994,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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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협회가 주관하여 1896년 11월 21일 영은문을 헐고 독립문을 기공하여 1897년 11월 20일 준공하였다. 1904년 당시의 모습이다.
16. 정장한 대한제국 고종황제(1897)
(서문당, 사진으로 보는 독립운동 상, 1987, 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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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7년 10월 12일, 고종은 환구단에서 황제 즉위식을 거행하고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쳤다. 청국의 제후국과 같은 형식을 탈피, 완전 독립국임을 선언했다. 황제는 고종이 계속 즉위하고, 1907년 순종이 계승했으나, 1910년 8월 29일 일제의 무력점령으로 '대한제국'은 막을 내렸다.
17. 운산금광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민족대백과사전 16, 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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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안북도 운산군 북진읍에 있는 우리나라 최대의 금광산. 1896년 미국인 모스가 대한제국으로부터 기한 25년으로 운산군 일원의 금광구를 특허받게 되었다. 모스는 동양합동광업회사를 조직하고 황실에 자본주 100에 대한 25주를 주고 일시금 25만원을 헌납하였고, 또한 매년 2만 5천원을 현상하였다. 1910년 우리나라가 일본의 식민지로 침해당하자 일본의 광업에 대한 일원화 정책에 따라 다른 외국인 운영의 광산과 함께 운산광산도 1939년 일본인이 경영하게 되었다.
18. 러일전쟁
(서문당, 사진으로 보는 독립운동 상, 1987, 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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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 2월 8일, 인천에 상륙한 일본군 기고시(木越) 여단의 시가행진. 배낭이며 군장이 아직도 우리 눈에 익은 모습이다.
19. 시일야방성대곡(시일야방성대곡)
(한길사,한국사 11, 1994,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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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11월 17일 한일신협약(을사조약)이 조인된 뒤 11월 20일 장지연이 {황성신문}에 쓴 논설.
"이 날에 목놓아 통곡하노라. 지난번 이등박문이 한국에 왔을 때 어리석은 우리 인민은 서로 말하기를 이등은 평소 세 개의 솥발이 서로 의지해 안정하듯이 동양 삼국의 안녕을 스스로 걸머지고 주선하던 사람이니 이번에 온 것이 반드시 우리나라의 독립 기반을 굳게 다질 계책을 권하기 위함일 것이다 하여 인천항에서 서울까지 관민상하가 더할 수 없이 환영하였다.
그러나 천하에는 헤아리기 어려운 일도 많도다. 천만 뜻밖에 5조약이 무슨 연유로 제출되었는가. 이 조약은 우리 한국만이 아니라 동양삼국이 분열하는 조짐을 빚어냄이니 이등박문의 당초 뜻이 어디에 있었던가. 그러나 우리 대황제폐하의 강경하신 뜻으로 거절해 마지않으셨으니 이 조약이 성립되지 못할 것은 이등박문 스스로가 알아 파기할 것으로 생각했는데 아 저 개돼지만도 못한 소위 우리 정부의 대신이란 자들이 사사로운 영화를 바라 머뭇거리고 으름장에 겁먹어 떨면서 매국의 역적됨을 달갑게 여겨서 사천 년 강토와 오백 년 종묘사직을 남의 나라에 바치고 이천만 동포를 몰아 남의 노예로 만드니 저 개돼지만도 못한 외부대신 박제순과 각부 대신은 깊이 나무랄 것도 없지만 명색이 참정대신이란 자는 정부의 수상으로 단지 부(否)자로 책임만 때우고서 명예를 구하는 밑천으로 삼을 계획이었던가. 김청음(김상헌의 호)처럼 항서를 찢고 통곡하지도 못하고 정동계처럼 칼로 배를 가르지도 못하고서 뻔뻔스럽게 살아남아 세상에 다시 섰으니 무슨 낯으로 강경하실 황상폐하를 다시 뵈올 것이며 무슨 낯으로 이천만 동포를 다시 대할 것인가.
아 원통하고 분하도다. 남의 노예된 우리 이천만 동포여 살 것인가 죽을 것인가, 단군기자 이래 사천년을 이어온 국민 정신이 하룻밤 사이에 갑자기 멸망하고 말 것인가. 원통하고 원통하도다 동포여 동포여"
20. 문화계몽운동 각 학회의 회보
(서문당, 사진으로 보는 독립운동 상, 1987, 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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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끌려가는 '105인 사건' 피의자들(1911)
(서문당, 사진으로 보는 독립운동 상, 1987, 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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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년 9월, '105 사건' 피의자들이 공판정으로 끌려가는 모습. 일제는 신민회의 주동인물을 포함, 서북지방 민족주이자 700여명을 '데라우찌 총독 암살음모'라는 혐의로 검거하여 1차 공판에서 105인에게 언도를 내린 날조극. 1912년 9월 28일 제 1심 언도에서 양기탁 등 6명은 징역 10년, 차이석 등 17명은 징역 7년, 양전백 등 38명은 징역 6년, 편강렬 등 41명은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
22. 여순형무소
(독립기념관, 해외의 한민족 조국독립운동 특별기획전 도록, 1995,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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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이 이등박문을 처단하고 체포된 뒤 갖혔던 여순형무소.
안중근은 1909년 10월 26일 한국에 이어 만주까지 침략할 야욕을 가지고 러시아와 협상을 벌이려고 하얼빈역에 도착한 이등박문을 총알 4발을 발사하여 처단하였다. 의거후 의연히 '대한독립만세'를 부르고 체포된 안중근 의사는 중국 여순에 있는 일제의 감옥에 수감되어 갖은 고초를 당하였다. 그러나 옥주에서도 세계평화를 위한 대한독립의 당위성을 당당히 밝혀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침략행위를 규탄하였다. 그리고 1910년 3월 26일 일제에 의해 서른 두살의 나이로 순국하였다.
여순형무소는 단재 신채호가 수감되었다가 순국한 곳이기도 하다.
23. 철도 방해로 처형된 세사람(1904.9)
(서문당, 사진으로 보는 독립운동 상, 1987, 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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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 9월, 러일전쟁이 한창일 때, 용산부근 에서 철도 방해죄로 처형된 한국인. 이토록 잔인한 사진을 그림 엽서로 제작하여 일본으로 보내지기도 했다({사진기록 일제의 침략} 사진 설명). 그런데 위책에서는 1905년 1월 1일, 경부선 철도가 개통된 지 이틀 후인 1월 3일, 일본군은 한국인 3명을 철도파괴음모라는 누명을 씌워 공개처형하는 만행을 저질렀다(헐버트 [Passing of Korea에서 전재)라고 사진 설명을 붙였다. 한편 같은 장면을 그린 것으로 보이는 '의병 학살'이라는 조선일보사 {격동의 구한말 역사의 현장} 화보 설명에서는 "이 화보가 조선일보 1986년 3월 9일에 실리자 동경대대학원생인 강창일씨와 서울대 사회학과 신용하 교수의 노력으로 화보에서 처형되는 의병 3명의 신원과 처형 일시, 장소와 당시 상황이 확인되었다. 처형되는 세 사람은 김성삼, 이춘근, 안순서로 1904년 9월 21일 오전 10시 용산과 마포를 잇는 도로변 철도 건널목 부근(지금의 마포구 도화동 야산 기슭)에서 강제 동원된 주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최후를 마쳤다."고 하였다.
24. 의병 모습
(최인진, 한국신문사진사, 열화당, 1992, 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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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말 의병전쟁 당시 의병들의 모습. 매켄지 {대한제국의 비극}에 실려있다. [한일신협약](정미7조약)으로 군대가 해산한뒤 진위대 장병들이 의병에 합류한 1907년 무렵의 모습이다.
25. 현상붙은 의병
(서문당, 사진으로 보는 독립운동 상, 1987, 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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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무분견소' 앞 게시판에는 의병들이 사진을 내걸고 현상수배까지 하였다(위책 사진설명). 그런데 처형된 사진인지 현상붙은 사진인지 모호하다.
26. 훈시하는 친일지사
(한길사, 한국사-12, 1994,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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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포된 호남 의병들 앞에서 훈시하고 있는 친일파 전라감사. 총을 든 일본군이 감시하고 있다. 체포된 의병들인지 주민들을 모아놓고 의병에 동조하지 말라고 훈시하고 있는 모습인지 사진만으로는 분명하지 않다. 장소는 목포이다.(서문당 {사진으로 보는 근대한국 상} 153쪽에 있는 '목포시가지' 사진과 157쪽의 숲에 덮인 1920년대 목포부청 사진과 일치한다)
27. 채응언 의병장(1915)
(사진기록 일제침략, 어문각, 1983,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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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숙천에서 의병을 일으킨 후 평안도.함경도.강원도 일대에서 활약하다 1915년 성천에서 잡혀 사형당한 채응언 의병장. 붕대로 감고 있는 모양으로 보아 격투를 하다 잡힌 듯하다.
28. 근정전 일장기
(동아일보사, 사진으로 보는 한국백년, 1978, 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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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8월 29일 조선을 병탄한 일제는 경복궁 근정전에 일장기를 걸어놓고 국권찬탈을 철저히 상징화하였다.
29. 3대 통감 데라우치 취임
(서문당, 사진으로 보는 독립운동 상, 1987, 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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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7월 23일 일본정부의 현직 육군대신 자격으로 3대 통감에 부임하는 데라우찌 행렬이 일본인 거리를 지나고 있다. 합병과 동시에 데라우찌는 조선총독부의 초대 총독이 되어 무단통치를 감행하였고, 6년 후에는 일본 내각 총리대신이 되었다.
30. 토지조사사업
(서문당, 사진으로 보는 독립운동 상, 1987, 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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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는 1910년 9월 30일부터 총독부에 '임시토지조사국'을 두고, 1912년에는 토지조사령을 공포하여 조사사업을 촉진, 1918년까지 '토지조사사업'을 실시.
31. 동양척식주식회사
(서문당, 사진으로 보는 독립운동 상, 1987, 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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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가 1908년 12월 자본군 1천만원으로 설립한 식민지 경제 수탈의 본거지. 을지로 2가에 있었다. 일본 정부로부터 거액의 융자를 받아서 한국의 토지를 손에 넣었다. 토지조사사업이 끝났을 무렵에는 7만8천정보 이상의 토지를 소유하여 한국 최대의 지주가 되었다. 동척의 소작료는 일반 민간보다 상당히 고율이었을 뿐 아니라, 수탈 방법도 악랄하였으므로, 한국인들의 동척에 대한 원한이 매우 깊었다.
32. 1910년대 학교교육
(사진기록 일제침략, 어문각, 1983,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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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아베르를 손에 쥔 교사들. 1912년 5월 전관리에게 무관복 착용 지시가 내려졌으며, 학교 교사들까지 경찰관 같은 위압적인 복장을 하게 되었다.
1911년에 나온 '조선교육령'이 나왔으며, 교육의 목적은 일본과 마찬가지로 '교육칙어'에 있는 것으로 되었다. 그 뒤로 공립학교에서는 '조선어' 수업 외에는 모두 일본어로 행하여지게 되었고, 조선어 수업도 대폭 감축되었다.
33. 토막민의 움막집
(사진기록 일제침략, 어문각, 1983,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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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을 빼앗기고, 소작마저도 할 수 없게된 농민들이 대도시 주변에 움막을 짓고 토막민으로 생활하고 있다. 산으로 올라가 불을 질러 밭을 일구어 농사를 짓는 화전민이 되기도 했으며, 만주와 일본등지로 이주하기도 했다.
34. 김알렉산드라
(정철훈, 김알렉산드라 평전, 필담,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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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 사진은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원이자 하바롭스끄시 쏘베뜨 외무부장 시절의 김알렉산드라(1918년). 1924년 전동맹 볼셰비끄 공산당 원동변강 위원회와 원동변강 직업동맹 쏘베뜨가 발행한 한글신문 {선봉}에 실린 것이다. 왼쪽 사진은 김알렉산드라(왼쪽)와 혁명동지였던 마리아 니꼴아예브나 사라판치꼬바. 마리아는 알렉산드라를 도와 소수민족의 권익보호에 앞장선 중국계 귀화인으로 알려져 있다.
김알렉산드라 - 알렉산드라 뻬뜨로브나 김(스딴께비치)는 1885년 2월 22일 러시아령 연해주의 우수리스끄에서 멀지 않은 시넬리꼬보 조선인 이민 농촌 마을에서 태어났다. 이곳은 1919년 3.1운동 이후 항일독립운동이 노령 지역 근거지가 되었다. 그의 아버지 김두서는 함경도 경흥사람으로 1869년 두만강을 건너 노령으로 넘어갔다. 1895년 아버지를 따라 만주로 갔으나 아버지가 죽자 친구인 스딴께비치에게 맡겨졌다. 그는 어리아의 불라디보스크로 돌아가서 알렉산드라를 여학교에 보냈다. 여학교를 마치고 교원으로 근무하다 후견인이었던 스딴께비치의 아들과 결혼했다. 가정불화를 견디지 못한 알렉산드라는 우랄지방으로 떠났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후 알렉산드라는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과 관계를 맺고, 1917년 초 당원이 되었다. 7월에 당사업을 위해 극동지방으로 떠나 선전.선동 사업을 전개하면서 활동하였다. 10월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극동지방대표자대회에 대표로 참가, 1918년 초에 하바로프스끄로 파견되어 당과 소비에뜨 사업에 참여하여 볼세비키 조직의 서기와 회계로 선출되고 외무위원 일도 맡았다. 알렉산드라는 여기서 소비에뜨 권력에 동조하는 전쟁포로들로 이루어진 국제군 조직에 전역량을 투입했다. 1918년 6월 말에는 100명으로 조직된 조선인 적위대에 참가했다. 1918년 9월 백군에 체포되어 심문을 받을 때 "나는 조선인민이 러시아인민과 함께 사회주의 혁명의 승리를 달성하는경우에만 나라의 자유와 독립을 달성할 수 있다고 굳게 믿는다"고 하였다. 사형당하기 직전 "고을고을마다 공산주의의 씨앗이 자라게 하소서. 그리고 기적의 꽃이 피게 하소서. 그리하여 그 꽃이 모든 장애와 바람과 폭풍우를 이겨내고 조선에 자유와 독립을 이루게 하소서. 나는 온 세상 노동자의 자유를 위해 이렇게 죽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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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웅(07)님의 댓글

박홍웅(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