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추어 레슬링 선수의 슬픈 두 귀
이정걸(02)
작성일
09-04-28 10:04 8,861회
1건
본문
- 아마추어 레슬링 선수의 슬픈 두 귀
/ 박후기
아마추어 레슬링 선수의 뭉개진 귀를 보면,
굳은 살 하나 박히지 않은
말간 내 두 손바닥이 부끄러워진다.
높은 곳을 향해 뻗어가는 벽 위의 덩굴손처럼
내 손은 지상의 흙 한번 제대로 움켜쥔 일 없이
스쳐 지나가는 헛된 바람만 부여잡았으니,
꼬리 잘린 한 마리 도마뱀처럼 바닥을 짚고
이리저리 필사적으로 기어 다니는
아마추어 레슬링 선수의 비애를 나는 알지 못한다.
고단한 생의 매트 위에서
데굴데굴 구르는 머리에 깔려 뭉개져버린
아마추어 레슬링 선수의 슬픈 두 귀를 보면,
멀쩡한 두 귀를 달고도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평형감각 없이
흔들리는 내 어리석은 마음이 측은하고
내 것 아닌 절망에 귀 기울여 본 적 없는 잘 생긴 내 두 귀가 서글퍼진다.
삶은 쉴 새 없이 태클을 걸어오고
아마추어 레슬링 선수의 몸은
둥근 통나무 같아 쓰러지고 구르는 것이 그의 이력이지만,
지구(地球)를 끌어안듯 그는 온몸 바닥에 밀착시키며
두 팔 벌려 몸의 중심을 잡는다.
들린 몸의 검은 눈동자는
수준기(水準器) 유리관 속 알코올과 섞인 둥근 기포처럼
수평을 잡기 위해 이리저리 굴러다니고,
아마추어 레슬링 선수의 두 귀는
세월의 문짝에 매달려 거친 바람 소리를 듣는,
닫힌 내일의 문을 두드리는 마음의 문고리다.
(시집 : '종이는 나무의 유전자를 갖고 있다 ' - 실천문학사 , 2006)- 클래식 키타 연주곡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