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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알기2편--충의사는?

이성호(07) 작성일 09-11-26 10:48 9,377회 1건

본문

충 의 사(忠義祠)

   

울산 사람들의 호국충정이 고스란히 서려있는 충의사(忠義祠)는 울산광역시 학성공원에 자리하고 있는데, 봄- ‘춘향대제’와  가을-‘추향대제’를 올려 임진왜란 때 몸바쳐 왜적과 싸운 선열의 충절을 기리고 있습니다.
당초 춘향제는 울산 임란 전투중 병영성을 탈환한 날인 5월 7일에 봉행하고, 추향제는 도산성의 왜병이 철수한 날인 11월 18일에 봉행하기로 했으나,

전국에 있는 원, 사, 당, 제에서는 춘 • 추 제향으로 봉행하고 있으므로,   울산 충의사에서도 이에 준한 행사를 거행하기 위해 춘 • 추 제향일을 봄과 가을 절후에 맞게 4월 15일과 10월 15일로 정해 2005년부터 봉행하고 있습니다.

충의사에는 227위의 임란공신 위패가 봉안되어 있습니다.  그 중에는 훈등 1등, 2등, 3등의 공신록권을 받은 분들과, 임란때 현저하게 공이 많은 의사분들이 함께 봉안되어 있는데, 그 분들에 대한 명칭은 통칭으로 의사(義士)라 부르고 있습니다.

이 충효사에 임난의사 박언복  공과 그 아들 박인립공도 함께 모셔져 있습니다. 그 분들은 명종때 호조판서를 하셨으며  청백리로 유명한  박수량 선생의 손자와 증손자가 되십니다.

이제 충의사에 가서 두 의사분들을 뵙고  지극한 충성(精忠)과 , 순수한 효성(純孝)을 기려보시기 바랍니다.

 

 

 

 

    임진왜란과 울산 의병

7년에 걸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은 조선의 국가와 민중에게 커다란 상처를 남겼다.
울산지역도 이에서 예외는 아니었다. 오히려 동남해안에 주둔한 가또오군과 최전선에서 맞서야 했던 지리적 여건 때문에 그 피해는 더 막심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울산지역의 농·어민 등 백성들은 이런 어려움을 굳건히 이겨내며 왜군에 항전하였다.
유생 등 지도층 인사들은 의병을 조직하여 지역의 요새지에서 유격전을 펼치면서 왜적과 맞서 싸워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정유재란 때에는 도산성에서 농성하는 가또오군을 공격하는 관군에 협력하여 적의 북상을 저지하였고, 마침내 적이 물러가게 하였다.
고난을 극복한 울산지역의 군민(郡民)은 국왕으로부터 각별한 칭송을 받았고 많은 인사들이 선무원종공신에 책훈되었다. 울산은 도호부로 승격되어 조선후기 내내 그 읍격(邑格)이 높아진 영광을 안았다. 향토와 조국을 지키다 산화한 선조들의 영령은 충의사에 위패가 봉안되어 오늘날에도 후손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관군이 일거에 무너진 울산에서는 선조 25년 4월 23일에 처음으로 기박산성(旗朴山城)에서 의병에 결집하였다. 이들은 박봉수(朴鳳壽)를 대장으로 삼고, 좌익장에 박응정(朴應禎), 우익장에 장희춘(蔣希春), 좌위장에 고처겸(高處謙), 우위장에 이봉춘(李逢春), 찬획에 심환(沈渙), 종사관에 이한남(李翰南), 운량호군에 이경연(李景淵) 등으로 대오를 편성하였다. 그 후 5월 5일에는 경주에서 유정(柳汀), 유백춘(柳伯春)등이 500여 명의 무리를 이끌고 합류하여 군세가 크게 늘어났다.


이들은 5월 7일 밤에 왜적이 점령하고 있는 병영성을 공격하여 수백 명을 참수하고 군기 군량을 노획하거나 불지르고 산성으로 개선하였다.
이로써 울산 의병의 군세가 크게 떨쳐졌다. 이외에도 인근 각지에서 울산 의병에 의한 소규모 전투가 벌어졌고, 그 중에서도 울산의 공암(孔巖), 달현(達峴), 사자평(獅子坪), 관문성(關門城), 이견대(利見臺)와 경주의 문천(汶川), 소등(所等)과 대천제(大川堤) 전투 등은 후세에 이르도록 각종 문집과 실기 등에 남아 전해져오고 있다. 이 전투들은 대체로 익숙한 지형을 이용한 유격전으로 치러졌고, 울산 의병의 용맹을 떨친 것이었다.


울산지역 의병장으로서 전술이 뛰어나 관군에 편입된 인물 중 특히 수전에서 많은 공을 세운 서인충은 어모장군(禦侮將軍) 훈련원정(訓練院正)에 임명되었고, 장희춘은 울산군수의 군관으로, 이겸수(李謙受)는 좌병사 군관 북부주부(北部主簿)로, 김언복(金彦福)은 경상방어사 군관 주부로 제수되었다. 특이하게 울산의 백정(白丁) 장오석(張五石)같은 천인에게도 반드시 관직을 주라 한 기록이 있다.

왜군들은 정유재침시에도 왜란초기인 선조 25년과 26년에 후퇴한 후 동남해안에서 축성하여 농성하던 방식 그대로 전세가 불리해지자 다시 동남해안으로 후퇴하여 수성(守城) 작전에 들어갔다.


가또오는 결국 선조 31년 11월 18일에 울산성을 불태워 버리고 퇴각하였다. 서생포성까지 모두 빈 성으로 남겨 둔 채로 철군해 버린 것이었다.
전란에서 큰 공을 세운 자들을 엄격히 심사하여 세 종류의 공신들을 선정 포상하게 된 것은 선조 37년(1604) 10월에 이르러서였다.
경상도체찰사 이덕형(李德馨)의 ‘울산읍민들이 왜적 토벌의 공이 가장 많다’는 보고를 받은 조정에서는 선조 31년 12월 21일에 울산군을 울산도호부로 승격시키고 부사(府使)를 임명하였다.


이어 병영과 언양현을 울산부에 합속시키고, 동 33년(1600)에는 부사 아래에 판관(判官)직을 증설하였다. 판관은 병마절도사가 부사를 겸할 때 그를 보좌하는 문신 막료이므로 당시에는 병마절도사가 울산부사를 겸했다는 뜻이 된다.
이 중 언양은 광해군 4년(1612)에 현으로 환원되었고, 판관도 동 9년(1617)에는 혁파되었다.


선조 31년 여름에 영남지방을 순회한 안무어사 이상신(李尙信)은 울산과 경주 의병들의 공로를 위로해 달라고 건의 하였다. 이에 따라 선조는 경상도관찰사 한준겸(韓浚謙)에게 명하여 주효와 포목 등을 갖추어 선무어사가 도착하는 날에 반급하고 호향(濠饗)하라 하였다. 이리하여 그해 12월 27일에 선무어사 윤휘(尹暉)가 경주에 이르러 선유기사(宣諭記事)를 반포하고 의병 위로잔치를 열었다.


울산과 인근지역에서 선무원종공신으로 확인된 공신은 1등공신 7인, 2등공신 34인, 3등공신 53인 등 합계 94인이었다.


이 외에도 명장(明將) 마귀가 썼다는 창표당안(蒼表堂案)에 등재된 인물이 있고, 1971년 간행된 ‘울산울주지’에 실린 인물이 있는가 하면 ‘선조실록’, 박진남(朴震男)의 ‘회암실기(悔巖實紀)’, 서인충의 ‘망조당유사(望潮堂遺事)’에도 이름이 실린 인물이 있다.
그러나 이 명단도 정확한 것은 아니며, 새로운 자료의 발견에 따라 더 늘어날 수 있다.


여기에다 광해군 원년(1609), 현종 13년(1672), 숙종 13년(1687), 동 25년(1699)의 울산호적대장에 선무원종공신이라는 신분 표기를 최근 발견하여 공신의 수는 더욱 늘어났다. 이들은 모두 94명이다. 이들 공신 혹은 의사들은 2000년 9월에 개관한 충의사(忠義祠)에 227위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지금까지 없었던 건물인데 2000년에 완공되었다 하군요..

 

내가 학교다니던 시절까지도 임란에 대한 연구와 자료가 부족하여

울산의 임진왜란에 대한 인식이 없었기에 학성공원이라 하여


벚꽂이 만개하는 날이면 공원에 올라 백일장을 했던 기억이..

 

하지만 이제와서 공부를 하고 관심을 갖고 보니 너무나

참담했던
임란 당시의 모습들이 그려지고 그 시대를

살고 가신 바로 이땅의
선조들의 고마움에

가슴깊이 감사하고 숙연해 집니다..




 

그리고 이제 학성공원을 도산왜성, 도산공원이라


불러야 마땅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잘못 불려왔다는 것을 안 이상 조속히

이름을
바꿔야 할것을 강력히 주장하며 울산지역과 나라를

지키기 위해 헌신한
선조들에 대한 예의라 생각됩니다..

 

한 개인으로서 울산시에 감히 제안 합니다


중구의 충의사와 구강서원을 축으로 울산성
과 

학성공원을
새로 만들어야 한다는 사실을..



참고로 저의 학성이씨 집안의 임란공신은 총 20여명으로
당시 학성이씨 창성 약200년으로 학성이씨 6세~9세까지가 해당되는
 시기이고 당시 학성이씨 추정인구(족보상) 약 70명정도 입니다..

이렇게 보면 울산지역 토박이로 거의 모든 저희 일족들이
임란에 참여 했다고 보면 될것 같습니다..
 
비록 한 지역의 토성이지만 울산의 주인으로서 당당히
일임을 다 하고 있음에 저희 학성이씨 일족들은 늘 긍지와
자부심으로 살아가며 울산을 사랑합니다..

-.선무원종 1등공신:3명
-.선무원종 2등공신:3명
-.선무원종 3등공신:8명
-.창의 의사...........:8명


- 일몽생각 - 

 


 

 

<충의사 입구 경사진 곳 홍살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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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사무소 앞 주차장에서 올려다 본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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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의문을 올라서면 정면의 상충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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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측 전시관, 좌측 숭모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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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의문을 들어서면 우측의 전시관내 모습>

 

도산성의 전투도는 일본인들이 전후에 자국에서 그려진

그림으로 당시의 참혹한 장면을 사실적으로 그렸으며

조명 연합군포위되어 도산성내 식량과 물이 고갈되어

말을 잡아 피를 빨아 먹는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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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의사내 선무원종공신 위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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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의사내 모셔진 선무원종공신外 창의 의사들 명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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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의 방계(농소갈래) 15대조 학성이씨 6세손 경연조(재월당조) 입니다

임란전 선조24년 3월에 임란전운으로 사회가 이미 어수선해서
경연조는 무리룡산에 뜻있는 분들을 모아 무리룡산 결의를 주도 하신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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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의 직계 13대조 학성이씨 8세손 한남조 입니다
기박산성 창의시 종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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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은(03)